160호 [시사기획] 노동시장유연화와 불안정노동자 - ② 불안정 노동자들의 삶
2003-04-04 14:51 | VIEW : 33
 
160호 [시사기획] 노동시장유연화와 불안정노동자 - ② 불안정 노동자들의 삶
노동시장 유연화가 사람을 잡아먹고 있다

윤애림 / 파견-용역노동자 노동권쟁취와 간접고용철폐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정책기획팀장

2000년 6월 30일 KBS 앞에서는 100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여 “부당해고 철회, 정규직화 쟁취” 등을 외치고 있었다. 그 날은 파견노동자를 보호한다는 이름으로 제정된 파견법이 시행된 지 만 2년째 되는 날이자, 10년이 넘게 KBS를 평생 직장으로 알고 운전대를 잡아온 노동자들이 오히려 그 파견법 때문에 해고되는 날이기도 했다. 파견법상 ‘2년 이상 근무자의 직접고용조항’을 회피하려는 사용자들의 불법적인 해고조치로 인해, MBC 160명, 인천 길병원 80여명, LG텔레콤 60여명 등의 파견노동자들이 ‘2년 이상 근무했다’는 이유로 일터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이것으로 대학살의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 KBS의 경우 매달 근무기간 2년을 채운 노동자들이 주기적으로 해고되었고, 다른 사업장의 경우도 예외 없이 해고의 악몽은 반복되었다. 도급으로 위장해 놓은 불법파견 사업장에서도 노동부 진정 결과, 불법파견 판정이 나오면 이랜드, 캐리어 등과 같이 도급계약을 해지하여 노동자를 집단 해고하거나 SK처럼 계약직으로 전환하는 사례도 잇달았다.

한편 구조조정에 따른 도급화로 집단해고를 당해야 했던 한국통신계약직노동조합이나, 노동조합 인정-주휴일 쟁취 등을 위해 싸워야 했던 건설운송노동조합, 노동부로부터 설립신고 필증조차 받지 못한 보험모집인노동조합 등의 사례에서 보듯 계약직이나 특수고용 형태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실태도 이와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정부와 사용자들은 비정규직이 자유롭게 원하는 시간에 일할 수 있는 선진적인 고용형태라고 선전한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가장 낮은 임금을 받으며, 가장 장시간으로, 가장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 고용안정은 꿈꿀 수도 없어서 사용주의 부당행위에 대해 문제제기 하기도 어렵다. 사용자들이 정규직을 비정규직으로 마음껏 전환할 수 있도록, 비정규직의 노동기본권을 축소하도록 지원하고,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한 것이 김대중 정권이 3년 동안 해온 일이다.

비정규직 대량 양산

5년 이상 일한 계약직 노동자 7천여명을 한번에 정리해고한 한국통신, 사내하청노동조합에 구사대를 투입하고 불법파견판정이 나자 전원 해고에 신규업체로 대체한 캐리어, 파견법 적용을 회피하기 위해 근무기간 2년이 되기 무섭게 해고하는 방송사, 용역노동자 정규직화 거부는 부당해고라는 서울지노위 판정도 무시하고 노동조합와의 교섭을 거부하고 있는 SK, 민영화 이후 구조조정을 추진하며 그간 불법파견 사용한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한 대한송유관공사 등 바로 이것이 비정규직을 대하는 기업들의 실상이다.

정부는 이 같은 사용자측의 불법파견, 부당해고, 부당노동행위를 엄격하게 처벌하기보다는 사용자 편을 들면서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있다. 경찰은 캐리어 노동자들의 농성장을 폭력으로 침탈해서 12명을 구속했고, 여의도에서 노숙투쟁 중인 건설운송노동자들을 도끼, 해머로 차를 부수면서 강제 연행해 총 9명을 구속했다. 한국통신계약직 노동자들도 200여일간의 투쟁과정에서 9명이 구속됐다. 노동자들의 장기투쟁 이유가 사용자측의 부당노동행위에 있는데도 사용자측은 단 한 명도 구속 처벌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노동자들에게만 탄압이 집중됐다. 작년 6월 즈음 자행된 파견노동자의 대학살에 대해, 계약직/임시·일용직/타업체파견/도급전환 등을 다 모아 2년 이상 된 파견노동자 중 86%가 고용을 보장받았다며 통계놀음을 일삼은 정부는, 그 후 10월 ‘계약직 3년 연장’, ‘근로자에 준하는 자 신설’ 등을 골자로 하는 소위 <비정형근로자종합보호대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말로는 비정규직 보호 운운하며 비정규직을 대량 양산하는 구조조정을 강행하는 것도 모자라 파견법에 뒤이어 비정규직을 제도적으로 공고히 하기 위한 방안 추진을 밝혀 노동자들을 분노하게 했다.

‘품앗이 투쟁’ 진행중

올해 들어서 정부의 이같은 태도는 더욱 노골화되어 비정규직에 대해 적극적인 이데올로기 공세를 꾀하고 있다. 최근 노동부는 연구용역 결과를 빌어 비정규직 규모는 과대 추정되어 실제 26%에 불과하며, 비정규직은 부정적인 느낌을 주므로 비정형근로자라고 표현해야 하고,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위해서는 정규직의 노동조건을 유연화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합법적인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너무나도 당연한 생존권을 요구하고 있는데도 이렇게 탄압이 집중되는 것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단결권 자체를 뿌리째 제거하려는 의도라고 밖에 볼 수 없다. 나아가 정부는 복수노동조합 유예, 여성관련 근로기준법 개악에 뒤이어 앞서의 파견법 확대, 계약직 노동자들의 계약기간 연장, 특수고용노동자들의 준근로자화 등을 골자로 한 비정규직 관련 노동법 개정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같이 사용자들과 정부에 의해 벼랑 끝에 내몰린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선택은 투쟁일 수밖에 없었다. 작년 6월 파견노동자의 대학살에 맞선 방송사비정규노동조합을 필두로 대상식품사내하청노동조합, 이랜드노동조합, 동우공영노동조합 등 많은 사업장이 한여름 폭염의 열기만큼이나 뜨겁게 비정규직 투쟁을 진행했다.  

그를 이어 삼창플라자시설관리, 대우조선사내하청, 볼보비정규직, INP사내하청, SK인사이트코리아, 캐리어사내하청, 대송텍, 한국통신계약직, 건설운송노동조합, 보험모집인노동조합, 한성CC, 88CC, 학습지산업노동조합, 홍익매점노동조합 등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억압과 굴종의 사슬을 끊고 노동기본권 쟁취와 비정규직 철폐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해왔으며, ‘품앗이 투쟁’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질 정도로 서로 연대투쟁을 활발히 벌여왔다. 저임금, 장시간노동, 고용불안 등 이제 더 이상 내몰릴 곳조차 없었기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당당히 투쟁을 선언했던 것이다.벼랑 끝에서 절절한 투쟁을 이어가고 있는 비정규노동자들의 요구는 아주 간단하다. “정규직화 및 부당노동행위사업주 구속 처벌.” 근로조건 저하와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까닭이 오로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인 것이므로 정규직화하여 노동기본권을 보장할 것과, 이제까지의 불법파견, 부당해고, 부당노동행위로 사태를 파국으로 몰고 간 사업주들을 구속 처벌하라는 것이다. 이는 상식적으로도 정당한 요구일 뿐더러 노동법상으로도 타당한 요구사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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