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호 [시사기획] 노동시장유연화와 불안정노동자-③ 사회적 일자리, 그 헛된 믿음
2003-04-04 14:54 | VIEW : 29
 
161호 [시사기획] 노동시장유연화와 불안정노동자 - ③ 사회적 일자리, 그 헛된 믿음
너희가 벤처를 믿느냐 !

유의선 / 서울지역실업운동연대 사무차장

97년 말 외환위기와 이에 따른 대량실업사태는 대다수의 국민을 공포로 몰아넣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실업노숙자들, 신문을 들고 산으로 오르는 우리의 아버지들. 누구나 ‘실업자’가 될 수 있다는 공포는 사회적 위기감을 형성하였고, 정부는 실업문제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여하며 대책을 수립하였다. 공공근로·정부지원 인턴제도·직업훈련·실업자대부·실업급여가 실업대책의 핵심을 이루었다. 그러나 당장 생활안정이 요구되던 외환위기 초반을 지나자 실업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은 ‘일자리 창출’에 있음이 계속적으로 지적되었다. 정부 실업대책의 4대 목표 중 하나인 ‘새로운 일자리 창출’ 정책을 보면, 사회간접자본(SOC)투자확대와 벤처기업 및 중소기업 창업지원, 귀농·귀어지원 등이다. 정부는 벤처기업에 대한 창업지원은 대규모로 이루어졌고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평한다.

IT도 경력자 원해

지난 8월 정부는 IMF 조기졸업을 자축하며 축하의 잔을 들었고, 뒤이어 9월 실업률이 외환위기 이후 최소치인 3.0%로 발표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실업대책을 실업규모 축소 중심에서 ‘질적인 고용정책’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와 거의 동시에 발표된 내용 중에 주목되는 것은 한국노동연구원에서 고용악화가 내년 1분기까지 지속될 것이라 지적했던 것과 정부가 투자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IT 중소벤처기업에 총 1천7백70억원 이상의 자금을 공급한다는 것이다. 실업률은 외환위기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는데 고용악화는 왜 지속되는가. 일자리창출사업의 효자노릇을 한 벤처기업은 왜 벤처의 겨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정부의 적극적인 벤처기업 육성지원은 새로운 일자리의 대안처럼 보여졌다. 이는 IT산업이 미산업이라는 이름으로 가치의 고평가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이미 ‘벤처거품’으로 비판되고 있으며 미래가치에 걸맞은 매출상승을 기대하는 것도 회의적이다. 그렇다면 고용창출 효과는 어떠한가.2005년까지 정보통신 분야의 부족한 인력은 업체 추산으로 50여 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IT분야는 기술교육만 잘 시키면(!) 1백만 실업자의 절반을 소화할 수 있는 시장이 된다는 것이다. 정부와 언론, 그리고 업계의 호들갑스러운 홍보는 대학생과 신규취업예정자, 실업자 그리고 현재 취업되어 있는 사람들까지 정보통신벤처의 전망에 기대를 걸며 교육에 열을 올리게 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상황은 좀 다르다. 한 조사에 따르면 IT인력 채용예정 기업의 79%가 경력자를 원한다는 것이다. ㄱ씨(33)는 정부의 무료교육은 부실할 것 같아서 고가의 학원비를 내고 전문학원에서 6개월 ‘실무위주’의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나이와 무경력으로 취업을 못하고 있다. “무조건 경력자 중심으로 구인이 이루어지며 실직자의 살길처럼 여겨졌던, IT분야도 다른 기업체와 마찬가지로 엄격하게 연령을 구분을 지어 버렸습니다. 또 교육수료 했다는 것으로는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밀고 헛짓거리 했다는 소리 듣기에 딱 알맞습니다.”더구나 정보통신 벤처의 일자리 변동률은 43%에 이른다. 이는 퇴출률이 지극히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런 고학력 노동력의 임금은 평균임금보다 낮다. 장기간 노동,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안하면 화려한 수식어로 포장된 벤처의 자율성과 수평성의 이면에는 장기간 노동의 혹사와 저임금, 엄청난 이동률과 빠른 퇴직률의 매우 불안정한 고용과 노동만이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인 보충으로써 모험이라는 이름으로 안정적인 일자리를 포기할 것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불안정 노동의 첨병, 벤처

저임금 구조보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단결권 자체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멀티데이타 노동조합의 투쟁은 이러한 벤처노동자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노동조합 자체가 주식시장의 불안요소라는 이유로 직장폐쇄까지 단행하는 것은 다른 측면으로는 벤처기업들의 생존전략 자체가 생산성이나 건전한 매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금융투기에 기대어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다. 벤처기업 자체가 생산성을 중심으로 한 판매이윤에 수익의 중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코스닥에 상장하여 투기적인 금융자본에 의한 투기의 내용이 전부인 것이다. 얼마 전 벤처기업에 취업한 ㅎ씨는 벤처기업의 내막을 알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회사가 그나마 잘 나가는 중상위권 벤처기업임에도 실제 연수익 8억을 33억으로 4배 이상 부풀려서 신고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각종 게이트’에서 드러났듯 상당수의 벤처는 부정하게 돈을 모으거나 대부분의 벤처는 매출수익 등을 부풀려 주식시장의 이익을 기대하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부풀려진 주식시장에서 남는 돈으로 일정정도의 고용을 창출한다고 해도 그 고용의 내용은 불안정 노동의 극대화일 뿐이다. 이러한 것을 ‘고용’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결국, 벤처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첨병으로써 경제의 금융화(위기)를 가속시킴과 동시에 노동의 불안정화를 가속화시키는 반노동자적인 정책에 불과하다. 따라서, 벤처 노동이라는 허상에 갇혀있는 한, (주되게) 정보통신업계 노동자의 노동조건은 악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벤처’는 그야말로 ‘모험(venture)’일 뿐이다. 정부의 일자리창출 계획의 희망이었던 벤처산업 육성은 정부의 갖가지 지원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벤처의 봄을 기다리며 현재의 경영난을 일시적인 위기로 치부한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 정보통신 벤처는 안정적인 고용과는 거리가 먼 불안정 노동의 첨병일 뿐이다.

교육을 잘 받으면 극소수일뿐인 골드칼라를 꿈꾸며 정보통신 벤처에 취업할 수 있다는 환상과 저학력 중고령 실업자들은 ‘눈높이를 낮추면’ 취업할 수 있다는 정부의 실업대책은 그 자체로 불안정 노동으로 밀어내는 정책이다.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은 ‘안정적이고 떳떳한 일자리’이다. 임시직이나 계약직, 그리고 모험을 강조하며 불안정 노동을 강요하는 것을 ‘고용’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기에 정부의 대책은 고용과 실업구조의 악화만을 불러올 뿐이다. ‘안정적인 노동과 생활의 권리’의 조건이 되는 사회적 일자리를 마련해야 하는 것은 국가가 국가로서 존립하기 위해 당연히 해결해야 하는 과제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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