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호 [시사기획] 대안교육, 요람에서 무덤까지 - ② 대안교육의 평가와 전망
2003-04-04 15:03 | VIEW : 29
 
164호 [시사기획] 대안교육, 요람에서 무덤까지 - ② 대안교육의 평가와 전망
제도교육의 늪지, 탈주가 능사는 아니다

손지희 / 진보교육연구소,불광중학교 교사

대안교육의 출발점은 자본주의 체제 하의 제도교육이 갖고 있는 문제점에 뿌리를 두고 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시도들이라는 점에서 제도교육의 ‘반면교사’ 격이다. 거칠게나마 대안교육을 정의해보면, 제도 안이든 바깥이든 현재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교육과는 다른 새로운 교육을 추구하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제도교육의 억압적이고 획일적 성격, 강력한 국가 통제, 개인의 개성과 자발성이 무시되고 선택권이 용인되지 않는다는 점, 비인간적인 입시위주 교육 등이 제도교육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교육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들은 공통적으로 기존의 공교육 제도 안에서 더 이상 만족스러운 교육을 기대할 수 없다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출발한다. 이렇게 출발한 대안 교육은 일차적으로 다양한 개인의 생각을 반영하는 자유로운 형식의 학교를 추구하며 제도보다는 인간을, 집단보다는 개인을, 교사보다는 학습자를 우선하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교사보다는 학습자를 우선으로 한다

지금은 교육에 대한 불만이 거의 폭발 지경이다. 교육주체들은 물론, 자본 역시 교육에 대한 불만을 거세게 토로해왔다. 한 마디로, ‘신자유주의’ 교육재편 시기이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교육재편시도가 제도교육에 집중포화를 퍼붓고 있는 시점에서 대안교육은 새로운 교육 창출에 어떤 의의가 있는가. 일단, 새로운 교육모델을 실험적 형태로나마 보여준다는 의미를 부정하기 어렵다. 그 속내야 어떻든 기존의 교육을 부정하고 이를 대신할 만한 새로운 틀을 시도하는 것은 보호받아야 할 일이다. 사회재편전략의 공격에 묶여 있는 제도교육 안에서 엄두내기 어려운 교육재구조화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대안교육의 영역이 담당해야 할 중요한 몫이다. 둘째, 현재 제도교육 내에서 거부당하는 아이들을 따뜻이 보듬어 안는 역할을 하는 대안교육에서 우리는 제도교육과 대안교육의 상보적 관계 맺기의 가능성을 엿보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긍정성을 대폭 인정한다 해도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주의 체제 하의 대안교육운동 내부의 일꾼들이 넘어야 할 벽은 가파르고 험난하다. 그리고 이들이 무조건 너그러운 눈길로만 보이지 않는 것이 제도교육 안에서 악전고투하고 있는 교사의 심정이다.

첫째, 현재 전개되는 대안교육의 치명적 결점은 그것이 보여주는 배타적 성격이다. 이는 대안교육이 제도교육과 또 다른 형태로 교육불평등을 용인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문제의식으로까지 연결된다. 이때 배타성은 대안교육 출발의 의미 자체에서 비롯되기보다는 여러 개인들의 제도교육으로부터의 탈출 욕구가 다른 이들을 배제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십상이라는 뜻이다. 이는 작은 흠으로 어물쩡 넘기기에는 너무 크게 다가오는 맹점이다. 민들레 편집장인 현병호 씨도 “중산층들만을 위한 대안이 아닌지, 또 그 때문에 대부분의 아이들을 위한 공교육이 무너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실제로 대안학교들은 일반학교보다 수업료나 기숙사비 같은 것이 더 많이 드는 것이 현실이고 경제적 여건이 따라주지 않아서 아이를 보내고 싶어도 못 보내는 가정도 많다. 홈스쿨링을 할 수 있는 가정도 얼마 되지 않는 것이 현실”이라고 고백하는 실정이다. 또한 대안교육의 ‘자유주의적 성향’은 신자유주의 교육재편과 조우할 가능성이 짙다. 단적으로, 대안교육이 흔히 추구하는 ‘자율성’, ‘다양성’, ‘개인 존중’의 가치는 신자유주의 교육재편의 수사들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 속으로 포섭될 우려는 현실적 근거를 갖는다. 학교설립자(민간)에 대한 대폭적 권한이양의 주장이라든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다양성의 주장은 자칫 잘못하면, 교육의 공공성을 훼손하는 흐름과 차별성을 갖기 어려워진다. 대안교육 실천가들의 주장에서는 평등을 곧장 획일성으로 연결시켜 이를 무작정 벗어나려는 위험성이 발견된다. 국가라는 통제자의 손아귀를 기껏 벗어나 자본에 투항하는 꼴이 되지 말란 법 없다. 대안교육 주창자들이 소리 높여 외치는 관료적 통제의 제거와 국가주의 교육의 극복은 당연히 귀기울일 부분이다. 하지만, 국가라는 장은 무조건 탈주만이 능사인 늪지가 아니라 공공성 확대를 위한 투쟁을 해나가면서 권력을 장악해야 할 각축의 공간일 수 있다.

대안교육과 신자유주의의 조우

또 하나 남는 문제는 다양한 스팩트럼을 보이는 대안교육 시도가 궁극적으로 제도권 교육과 공존하면서 이를 보완하는 지원군이 될 수 있느냐라는 점이다. 언론과 정부는 대안학교라든가 홈스쿨링을 공교육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전략적으로 이용하곤 했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교육재편 전략에도 ‘대안’이라는 용어를 갖다 붙이면서 진정한 의미의 대안 시도와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 이는 대안교육의 실천가들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일지 모르지만, 그만큼 대안교육 실천가들에게 철저함이 요구되는 시기라는 뜻이다. 제도교육에 대한 거부감으로 똘똘 뭉쳐 산 속으로, 혹은 각자의 가정으로 들어가 버리면 이도 저도 택할 여지가 없는 ‘가진 것 없는 자’의 자녀들은 그나마 제도교육 내에서 근근히 누려온 교육 기회조차 빼앗겨 버린다. 애플은 제도교육 내에 존재하는 위험을 피해 혹은 이에 대한 불만 해소를 위해 개인중심으로 사적영역에서 모색하는 대안들은 제도교육이 갖는 위험이나 문제보다 훨씬 더 나쁘다고 단언한다. 제도교육은 우리에게 이중적으로 다가온다.

학교는 자본주의의 불평등한 계급 구조를 재생산하는 위험한 공간이면서도, 여러 계층과 사람들을 가로지르는 공통의 언어, 혁명의 언어를 유포시키는 가능성의 공간이기도 하다. 지금의 신자유주의 교육재편 국면은 전자가 후자를 완전히 압도하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대안 교육은 제도교육에 대한 공격의 구실로 악용되는 걸 용인함으로써 신자유주의 교육재편의 하위파트너가 이용당해선 안된다. 제도교육이 갖고 있는 가능성을 확장시키기 위해 더 많은 한계와 싸우고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동반자여야 한다. 질 높은 교육, 이상적인 교육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 나는 이러한 기회에서 철저히 소외되어 있는 아이들을 매일 만나고 있다. 그리고 나 역시 교사로서 ‘못할 짓’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렇다고 해서 제도교육의 추악한 면에 질려 벗어나려고만 들면? 아직도 많은 아이들은 제도 교육 ‘안’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우리가 대안을 찾아야 할 곳은 바로 이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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