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호 [사회쟁점] 미국의 '악의 축' 발언
2003-04-04 15:07 | VIEW : 34
 
165호 [사회쟁점] 미국의 '악의 축' 발언
'공'은 여전히 미국이 들고 있다

임필수 / 사회진보연대 정책부장

부시의 입에서 튀어나온 ‘악의 축’이란 말은, 이들 세 나라가 미국 안보와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은밀한 정치동맹을 형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그러나 이들 나라가 실제로 추축을 형성했다는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이들 세 나라가 미국에 대한 적대감을 공통적으로 갖는다는 점은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정치적으로 연합돼 있지 않고, 분명히 분할돼 있다. 이란과 이라크는 전쟁을 벌인 후, 아직도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북한은 이란 또는 이라크와의 동맹국이 아니다.

북한이 탄도미사일 기술의 판매를 위해 이란, 이라크 등과 접촉했다는 증거는 존재하지만 이것이 곧 정치적 연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예컨대 북한과 미국의 우방인 파키스탄과의 미사일 관련 상업 거래량이 더욱 많다. 그리고 북한이 미사일 관련 기술을 판매하는 게 불법적이라고 단죄할 국제적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미국이 미사일 판매 1위라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들 각각의 군사력은 미국이 묘사하는 ‘악의 축’에 걸맞을 만큼 위협적인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이라크는 페르시아만 전쟁과 전쟁 이후 UN의 사찰을 통해 무기 생산기반이 붕괴되었다. 또한 미국은 이미 첩보위성과 항공기를 통해 이라크 전역을 샅샅이 조사하고 있으며, 페르시아만 전쟁 이후에도 의심이 가는 지역에 대한 공중폭격을 지속했다.

북한은 핵무기 개발 중단

한편 이란은 경제난 속에서 군사비를 지속적으로 삭감해왔으며, 최근에는 해외투자, 무역관계를 고려해 주요 핵시설에 대한 사찰을 허용했다. 그렇다면 북한은 어떠한가? 물론 북한은 1998년 인공위성 시험발사를 통해 군사기술 수준을 과시한 바 있다. 그러나 북한은 1994년 미국과의 제네바 기본합의를 통해 미국과의 전면적인 관계 개선을 전제로 핵무기 개발 중단을 실제로 수용했다.

북한은 제네바합의를 성실히 이행해온 반면, 실제 제네바합의를 고의적으로 방기하고 있는 쪽은 미국이다. 또한 북한은 미사일 문제에 관해서는 1999년 중국 및 러시아와의 협의를 거쳐, 미국이 양국간의 상호관심사에 대한 협상을 지속한다는 전제 하에서 2003년까지 미사일 시험발사를 유예한다는 중대 결정을 발표한 바 있다.

북한은 부시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이 약속을 지키고 있으나, 부시정부는 북한과의 미사일 협상을 거부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객관적 사실을 고려할 때,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은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의 확대를 합리화하고, 미국의 군사력 증강에 명분을 부여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로 해석해야 한다.

1990년대 이후 미국의 대북정책의 중핵은 북한의 대량살상무기 즉, 핵-미사일을 동결하고 종국적으로는 해체하는 것이다. 제네바합의는 그러한 미국의 목적에 따라 이루어진 북미간의 최초의 합의였다.

그 핵심적 내용은, 북한이 영변 지역의 핵시설을 동결하고 궁극적으로 해체하는 대신에, 미국이 그것을 대체하는 경수로형 발전소 건설을 책임지며 북한과의 정칟경제적 관계의 완전 정상화의 길로 나아가기로 양국이 약속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제네바합의를 두 가지 측면에서 결정적으로 위반하였다.

하나는 관계정상화의 약속을 접고, 한미 공동으로 4자회담을 역제안한 것이다. 그것은 당시 북미관계의 진전 속도가 빠르다고 불만을 품고 있던 김영삼정부에게 비토권을 부여하는 효과를 낳았다. 또 하나는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면서 경수로 건설을 실질적으로 지연시킨 것이다.

미국, 북한의 무장해제 목적있어

물론 미국이 제네바합의 이행을 고의적으로 방기한 것은 ‘북한붕괴론’ 또는 ‘연착륙론’ 등을 적극적으로 유포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와 같은 미국의 책임방기로 인하여, 부시정부 등장 이후 제네바합의 이행 문제는 양국간에 다시 뜨거운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북한은 북미대화가 재개된다면, 그 최우선적인 의제는 바로 경수로 건설 지연에 따른 전력손실 보상이 돼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바 있다. 그러나 미국은 경수로 건설이 늦어질 경우 보상에 관한 명문화된 규정이 없으며, 경수로 건설의 지연에도 불구하고 2단계 사찰 활동이 시작돼야 한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북미간의 미사일 협상도 난항을 겪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와는 달리, 북미간의 미사일협상은 북한의 국제협정 ‘위반’문제를 다루는 것이 결코 아니다. 즉, 북한의 미사일 개발 및 수출은 분명 북한이 주장하는 바대로 ‘자주권’의 영역이다. 따라서 미국은 이 문제를 협상의 의제로 끌어들이기 위한 유인과 전략이 필요했던 것이다.

클린턴정부 말미에 북한과 미국은 이 문제에 관한 핵심 쟁점에 대해서 합의를 봤으나, 북한 국내에서 직접 ‘검증’하는 문제와 이미 배치된 약 1백 여기의 노동미사일의 해체 문제를 미국이 추가적 의제로 제기하면서 협상이 좌초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여전히 큰 갈등의 소지를 남기고 있고, 미국으로서도 아직까지 뾰족한 전략을 입안하지 못하고 있다.

결국, 미국은 사회주의권의 붕괴 이후 북한의 경제난 심화를 지렛대로 삼아서, 북한에 대한 무장해제만을 목적으로 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 것이다. 제네바합의 이행이나 관계정상화 등의 북한의 기본적인 요구에 대해서는 단지 미봉책으로 일관해 왔다. 따라서 부시의 ‘악의 축’ 발언은 미국의 책임을 다시 북한에 떠넘기려는 정치적 복선 위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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