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호 [시사기획] 우리 시대의 혁명, 어떻게 가능한가- ① 혁명 개념의 아포리아
2003-04-04 15:14 | VIEW : 33
 
169호 [시사기획] 우리 시대의 혁명, 어떻게 가능한가- ① 혁명 개념의 아포리아
前 미래의 형태로 다가오는 혁명

이재원 / 영문학과 석사 수료

“폐하, 이것은 반항이 아닙니다. 이것은 혁명입니다”라는 말과 함께 루이 16세의 목을 단두대에서 날려버린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 이래, 혁명이라는 단어가 지금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됐다는 건 이제 상식이다. 그러나, 1640년의 청교도 혁명 당시에는 혁명이 ‘신의 뜻’으로 불렸고, 1688년의 명예 혁명 당시에는 ‘법적 권위의 복원,’ 1774년 미국혁명 당시에는 ‘독립,’ 1917년 볼셰비키 혁명 당시에는 ‘진보’라는 뜻이 강했다는 점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마치 인권 개념이 자유권에서 참정권으로, 그 다음에는 사회권으로 확장됐듯이, 혁명 개념 또한 끊임없이 확장되어 왔던 셈이다. 이렇듯 혁명 개념이 확장된 데에는 지식의 확산뿐만 아니라 투쟁의 확산이 한 몫을 해왔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 결과 우리는 오늘날 “구체제의 전복을 통한 새로운 사회 질서의 총체적 건설”이라는 혁명 개념을 갖게 됐다. 물론, 이는 상당히 ‘느슨한’ 혁명 개념이다. 요컨대, 구체제를 누가, 왜,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바꾸느냐의 문제, 즉 혁명의 주체(특정 정치분파냐 대중운동이냐), 원인(기존 정부의 정당성 상실이냐,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불일치냐, 기존 사회질서의 비효율이냐), 방법(입법적인 수단이냐, 폭력적인 물리력 행사냐), 결과(사회적 퇴행이냐 발전이냐) 등을 둘러싸고, 연구자들은 아직까지 논쟁을 하고 있다(이에는 혁명이 자발적이냐 계획적이냐의 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더군다나, 혁명의 사회적 전제조건을 둘러싼 논쟁까지 염두에 두면, 우리는 혁명 개념을 정의하는 게 마치 지뢰밭을 춤추며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될 것이다.

게다가 혁명 개념을 둘러싸고 비교적 최근에 전개됐던 논쟁도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구 소련의 붕괴와 동구권 사회주의 정권의 몰락 이후, 수많은 사람들은 현실 사회주의의 실패 원인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정작 흥미로운 점은 크게 외재적 원인(미국과의 군비증강 대결, 서구의 각종 봉쇄정책 등)과 내재적 원인(공포정치를 통한 독재, 낙후된 경제, 사회적 합의형성의 실패 등)으로 분석이 진행되는 가운데, 잊혀졌던 정치혁명, 경제혁명, 문화혁명의 구분법을 연상케 하는 문제설정이 일부 좌파들에게서 나왔다는 점이다.

혁명은 새로운 사회질서의 총체적 건설

제2차 인터내셔널 시기의 엥겔스가 맑스의 토대-상부구조라는 은유를 정치, 경제, 이데올로기(문화)라는 삼각구도로 확대하고 볼셰비키들이 이를 받아들인 이래, 이런 구분법은 소련을 중심으로 한 제3차 인터내셔널이 볼셰비키 혁명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옹호하는 클리셰(clich?가 된 바 있다. 가령, 1918년 러시아 공산당 제7차 당 대회에서 레닌은 경제혁명이 정치혁명에 선행하는 ‘부르주아 혁명’과, 정치혁명이 경제혁명에 선행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구분하면서, 볼셰비키 혁명이 ‘자본에 반(反)한 혁명’이라는 서유럽 좌파들의 비판을 일축했다. 레닌의 구분법을 좀더 확장한 것은 늘 그랬듯이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은 레닌 사후 1928년에 제1차 5개년 계획을 착수하면서 문화혁명을 ‘계급투쟁’으로 정의한 뒤, 경제혁명과 문화혁명에 정치혁명에 뒤따르는 부르주아 혁명 대 정치혁명이 경제혁명과 문화혁명에 선행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는 구분법을 확정했다.

이와 비슷한 사유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1966년에 시작된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혁명의 자기쇄신’이라며 환영했던 서유럽(특히, 프랑스) 좌파들의 이론이 포스트구조주의/포스트맑스주의라는 정체불명의 이름으로 유입되고, 이른바 ‘68혁명’이라고 불리는 서유럽의 경험이 광범위하게 소개된 이후(대략 1994년경)부터다. 특히, 문화혁명의 성격이 강했던 68혁명은 고도로 발달된 선진 자본주의 사회를 위기에 빠뜨린 가장 최근의 사건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오늘날에 가능한 (유일하진 않더라도) 최선의 혁명 모델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가져오기도 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 있었다. 특정 사회구성체를 정치, 경제, 문화 영역으로 구분하는 게 가능하다면, 이 모든 영역을 바꾸는 것이 완전한 의미에서의 혁명이 아닐까. 만약 이런 문제의식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제 우리는 정치혁명, 경제혁명, 문화혁명을 이렇게 구분할 수도 있겠다. 정치혁명은 지배양식을, 경제혁명은 생산양식을, 문화혁명은 존재양식(생활양식)을 새로운 형태로 건설하는 것이다.

이론과 실천, 이중투쟁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이 세 가지 형태의 혁명은 볼셰비키들의 말마따나 단계적으로 이뤄지는 것인가, 아니면 서로 뒤엉켜 발생하는 것인가? 그리고 (비교적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경제는 일단 제쳐두고서라도, 어디까지가 정치 영역이고 어디까지가 문화 영역이냐. 오늘날, 정치와 문화의 구분은 “모든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이다”라는 페미니즘의 구호가 공표된 이래,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을 구분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워졌다. 경제는 항상 정치경제고, 정치는 항상 문화정치고, 문화는 항상 문화경제라는 것이 우리가 지난 세기의 모든 경험에서 얻은 결론이니 말이다. 결국, 우리는 한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셈일까. 그렇진 않을게다. 무릇 모든 반복은 차이를 낳는 법, 비록 이렇다 할 결론은 아직 내릴 수 없지만 우리는 좀더 폭넓은 시각을 확보한 셈일 테니.

지난날, 우리는 자신이 따지 못한 저 포도가 신맛이 날 것이라고 우기는 자들과 투쟁해야만 했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이 딴 포도가 단맛이 난다고 강권하는 자들과 투쟁하고 있다. 오지 않은 미래를 증명하는 것만큼이나 오도된 현실을 꿰뚫어보는 것도 상당히 어려운 일이지만, 우리가 아직도 혁명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혁명의 가능성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지난날의 혁명이 안고 있던 일체의 아포리아를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무릇 혁명은 항상 ‘전미래(前未來)’의 형태로 우리에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오늘의 혁명은 어제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그리고 어제의 혁명을 참조할 때에야 오늘의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따라서, 혁명은 언제나 이중의 전미래며, 이중의 투쟁을 요구한다. 즉, 이론과 실천 두 영역에서의 투쟁을. 그리고 그 몫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에게 남겨져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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