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호 [시사쟁점] 유럽에 부는 우경화 바람
2003-04-04 15:17 | VIEW : 31
 
170호 [시사쟁점] 유럽에 부는 우경화 바람
잃어버린 장미정원에 무슨 일이 있었나

박상호 / 정치외교학과 석사 과정

프랑스 대통령 결승 투표에 사회당의 죠스팽 후보가 진출하리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하더라도 르펜이 진출하리라고 누가 예견했겠는가. 충격, 경악, 지진. 어떤 말로 표현해도 뭔가 부족하다.
르펜 자신마저도 흥분시킨 이 사건앞에서 프랑스는 물론이고 전유럽인들은 아연실색했다. 그 배경에는 르펜으로 대변되는 극단적 인종차별주의와 국가사회주의로 무장한 극우보수의 부상이 유로화의 탄생으로 이제 막 결실을 맺은 하나된 유럽의 흐름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존재한다. 한편 너 나 할 것 없이 경기침체와 사회불안을 경험하고 있는 전 유럽을 2차 세계대전 직전의 혼란스러웠던 상황으로 몰고 갈 수 있다는 공포감마저 감돌았다.

그러나 결선투표를 앞둔 프랑스 좌파 지지자들의 상기된 표정에선 두려움보다 더한 수치스러움을 발견할 수 있다. 오만한 다수 좌파연합과 그들의 좌장인 죠스팽에게 이 같은 패배가 처절한 반성의 계기가 될런지는 몰라도 결승투표에까지 르펜의 선전이 지속된다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말 것이다. 투표권을 얻은 이후로 투표소에 몇 번이나 가보았던가 좌파에게도 몇 번 던져주지 못했던 소중한 한 표를 거짓말쟁이 시라크를 위해 행사해야 하는 전례 없는 정치현실은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향기잃은 장미의 몰락
15개 EU 회원국 중 한때 13개국에서 좌파가 집권했던 90년대 유럽은 유럽사회당과 사민당의 장미로고를 빗대어 ꡐ장미정원ꡑ으로 불렸다. 70년대 경기둔화 국면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의 바람은 그 후 20년간 서유럽 경제성장의 근간이던 노동과 자본간의 계급타협의 기본원칙을 깨뜨렸다. 그후 찾아온 얼마간의 사민주의 시대 좌파의 임무는 20년간의 신자유주의가 효율성을 내세우며 빼앗아간 인간 삶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인간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것이었다. 그 근간에는 프랑스 혁명 이후 꾸준히 논쟁을 계속 해온 성장과 분배간의 저울질이 존재한다. 그들이 전파시킨 자본주의는 성장의 이름표만을 달고 있었지만 유럽의 전정기관에는 효율성과 형평성간의 균형을 이루려는 평형감각이 존재한다. 효율성에 대해선 결코 미국을 따라잡지 못하면서도 이러한 종류의 균형감에는 긴 역사적 경험을 통해 습득된다는 강한 자신감이 베어있다.

하지만 이미 신자유주의를 향하고 있는 유럽의 시계를 되돌리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좌파가 제시한 해결책 역시 그 궁극은 효율성이 지배한다. 계급타협 체제와 사회적 동반자 관계를 유지하려면 생산성 향상과 자국자본의 국제 경쟁력 강화를 통해 더 많은 빵을 획득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결국 신자유주의를 표면화하고 있지는 않지만 유럽에서 경기부흥과 실업구제 그리고 사회 안전망의 회복을 주장하는 모든 정치적 선전의 저변에는 하나같이 신자유주의의 냉정함이 자리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니는 한 이제 유럽의 어느 곳에서든 예전과 같은 ꡐ사회주의ꡑ와 ꡐ자본주의ꡑ간의 구획에 기반한 ꡐ좌ꡑ와 ꡐ우ꡑ의 경계는 의미 없는 것으로 치부되고 만다. 사민주의의 모범이라 칭송되는 스칸디나비아도 예외는 아니다. 핀란드와 스웨덴에서도 전통적인 좌파 사회 복지정책의 핵심인 사회 안전망을 느슨하게 하고 공공 서비스업을 사유화는 정책 수정은 불가피한 것으로 묵인되지 않았던가.

하나의 유럽으로 극복하리라는 통합의 프로젝트 역시 좌절되고 말았다. 통합으로 인해 기업들은 더 빨리 팔려나갔고 일자리는 더 빨리 축소되어 갔지만 이윤을 챙긴 보따리는 금새 또 다른 이윤을 향해 어디론가 이동해 버리고 만다. 남겨진 것은 오직 이름 모를 그 누군가의 성장을 위해 그늘로 비켜간 소외된 사람들뿐, 사회적 불평등과 무질서가 가져온 위협은 국경 넘어 존재하는 또 다른 위협과 조우하며 급기야 전유럽을 안전의 사각지대로 몰아넣었다. 불안한 대중의 심리를 반영이라도 하듯 유럽의 심장부에서 반세계화의 깃발이 드높았을 때 좌파는 무엇을 했던가. 삶의 기반이 위협받고 있는 소외계층에게 르펜의 단순하고 명쾌한 해결책은 대안이기에 충분했다.
결과는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이탈리아 5월 총선에서 이탈리아 국민들은 재벌인 중도 우파 손을 들어줬다. 이어 지난해 노르웨이와 덴마크에서 연거푸 우파 정권이 출범했으며 올해 들어 포르투갈 총선에서도 우파가 승리했다. 독일에선 8년만에 지방의회 선거에서 우파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9월 총선의 전망을 어둡게 했다.

전편보다 나은 속편은 가능한가
유럽에서 좌파집권의 드라마는 현재 종국으로 치닫고 있다. 이 시점에서 거물 좌파 지도자의 실패에 크게 주목한 세계 언론의 관심은 출연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드라마가 얼마만큼 흥행을 거두었던가를 상기시켜주었다.
따라서 속편의 제작 여부를 진지하게 고려중일 것이다. 일단은 프랑스와 독일의 총선을 두고 봐야하겠고 EU의 공동헌법 조약이 완성되는 과정 또한 지켜볼 것이다. 이 두 사건은 두말할 나위 없이 이번 속편의 롱런 여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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