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호 [시사기획] 우리시대의 혁명, 어떻게 가능한가 ③ 우리 시대 대안, 혁명
2003-04-04 15:57 | VIEW : 17
 
171호 [시사기획] 우리시대의 혁명, 어떻게 가능한가 ③ 우리 시대 대안, 혁명
국가권력을 둘러싼 개인과 사회의 문제

유진홍 / 사학과 석사

우리가 흔히 ‘68’이라는 연도로 약칭하는 1960년대 후반 서구와 일본의 학생반란이 급격하게 확산된 것은 당시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뜻밖의 사태였다고 말할 수 있다. 2차 대전 이후 자본주의는 새로운 활력을 얻어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으며, 케인즈주의적 복지국가는 사회적 부의 재분배를 통해 중산층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사회 불만세력이었던 노동자까지 대량생산 시대에 걸맞는 소비자로 만들어냈다. 실제로 우리가 ‘68’하면 자동적으로 떠올리는 파리의 5월 봉기를 주동한 프랑스 학생운동도 그 한달 전만 하더라도 별로 대단치 않은 세력이었다.

오히려 5월 봉기를 주도한 다니엘 콘벤디트 같은 사람은 그 몇 달 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서독 학생운동이 주도하는 시위를 목격하고는 ‘우리도 언젠가 이렇게 하고 말겠어’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당시 서독 학생운동 역시 1967년 6월 2일 서베를린에서 베노 오네조르크라는 학생이 경찰이 쏜 총에 사살당하기 전까지는 대중적이지 못했다. 그러므로 성서에 나오는 심판의 날처럼 혁명도 ‘도적같이’ 온다고 말하는게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과연 ‘68’이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혁명은 국가권력의 문제이다’라는 레닌의 정식을 떠올린다면 말이다. 우리는 흔히 ‘68’을 ‘혁명’이라고 말하는데 익숙하지만, 정작 서구에서는 ‘혁명’이라는 용어보다는 ‘반란(revolt)’이나 ‘봉기(uprising)’를 더 많이 사용한다. 실제로 정권퇴진 직전까지 이른 경우는 프랑스 5월 봉기 밖에 없었다.

추상적 사회주의 거부

그나마 사태의 강렬함에 비해, 봉기는 드골이 의회 해산과 총선 실시를 하겠다는 방송과 함께 ‘프랑스 만세’를 외친 이후에 급속하게 사그러져갔다. 물론 1960년대 후반 대부분의 나라에서 학생들, 또는 신좌파가 정치권력 자체의 획득을 목표로 한적은 없었다. 또한 정치투쟁 그 자체는 각 나라마다 약간의 편차가 있기는 해도 대부분 실패로 그쳤으며, 정치투쟁을 지속적으로 이끌만한 단일한 지도세력이나, 프로그램, 이데올로기는 부재하였다. 애초에 학생운동이 강력하지 못하고, 마오주의, 트로츠키주의, 아나키즘 등의 여러 소수 세력이 혼재되어 있던 프랑스는 말할 것도 없고, 서독의 경우에도 사회주의 독일 학생동맹(SDS)이 주도적인 역할을 떠맡기는 했지만 이들 역시 조직적 차원에서 단일 프로그램으로서의 강령을 채택한 적은 없다. 오히려 이들은 자신들도 놀랄만큼 진전되는 정세의 고양 속에서 대중의 자발성에 주목하였다. 콘벤디트가 ‘바리케이드의 밤’에 “오늘은 총사령관도 지도자도 없습니다!”라고 시위대에 소리치고, 루디 두취케가 기존 SDS 조직구조는 대중의 자발성에 뒤쳐질 수밖에 없다며 새로운 정치투쟁 방식으로서 ‘행동을 통한 프로파갠더’를 제안한 것은 같은 맥락 하에 있다. 그들은 “자기 삶의 활동과 관련이 없는 추상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대중의 자발성에 근거한 ‘혁명적 실존’의 문제를 주목했다. 다시 말해 혁명은 국가권력의 문제라기 보다, ‘국가권력을 둘러싼 것들의 문제’이며, 개인과 사회의 문제이다.

흔히 68 학생반란을 2차대전 이후 서구 사회를 새롭게 형성한 사회문화 혁명으로 바라보는 것은 이때문이다. 그러나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에서 암시하는대로 68 자체가 사회문화적 변혁을 발생시켰다기 보다는 그 과정에 위치하는 전환점으로 표기하는게 옳은 듯하다. 사회학자 하인쯔 부데가 68을 평가하면서 인용한 페르낭 브로델의 말대로 ‘끝없는 구조화, 탈구조화, 구조변형이 갑작스럽게 하나의 지점에 집중될 때에, 전환점이란 장기 지속으로 전개되던 역사적 과정 속에 있는 단락들’(Das Altern der Generation)이다. 하지만 단지 이렇게만 말한다면, 68 학생반란은 역사의 장기적 변동 속에 하나의 이정표 정도로 축소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혁명적 유토피아 정신의 회복

그러나 좀더 다른 식으로 생각해보자. 결국 명시적으로는 실패한 한 세대의 반란이 30년이나 더 지난 지금에서, 우리를 포함한 이후의 세대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서 ‘낡은 시대가 네 뒤에 있다!’라거나 ‘모든 가능성과 교류하라!’ 등의 68 당시의 구호들을 한국의 대학 캠퍼스에서 마주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이 68이 갖고 있던 혁명적 유토피아 정신과 그 낭만성 때문이다.

68 학생반란은 사회민주주의와 볼셰비즘이 자리를 잡은 이후에 좌파 정치에서 깨끗이 청산해버린 혁명적 유토피아 정신을 19세기로부터 인용해 왔다. 파리 5월 봉기의 절정을 이룬 5월 10일의 ‘바리케이드의 밤‘은, 어떻게 당시 참여자들이 그동안 기술주의와 사회적 진보라는 이름하에 거세되어왔던 혁명적 유토피아의 정신을 어떻게 과거로부터 인용해왔는지를 보여준다. 그때 라땡 구에 모여든 3만명의 시위대는 특별한 전술적인 이유도 없이 단지 파리 코뮨과 19세기의 다른 파리 혁명을 ‘인용’하기 위하여 수십개의 바리케이드를 쌓았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지금’ 그리고 ‘여기’라는 현재를 특별하게 만들며, 그 속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도 케케묵은 부르주아적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아무것도 아님’이 아니라 ‘모든 것’으로 체험하는 것이다.(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이 될 것이다!) 분명 이러한 혁명적 유토피아 정신과 낭만성은 당시 참여자들의 자발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물론 1917년 러시아 혁명을 비롯한 모든 혁명은 이러한 유토피아의 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기를 원한다!”라는 구호를 내걸었던 크론슈타트 수병반란이 같은 혁명군의 손에 진압당하고 난후 본격적으로 소비에트 정부가 선진 자본주의 국가를 산업적으로 따라잡기 위한 사회주의 원시축적에 매진함에 따라, 러시아 혁명 역시 노동의 물신화와 기술 산업주의 사회로 진입한다. 여기에서 대중은 단지 근대적 산업화를 위해 노동해야하는 동원의 대상일 뿐이며, 그들이 노동하는 존재가 아닌 다른 것으로 변한다는 것은 국가에게 위협적인 일이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68을 주도했던 많은 사람들이 다니엘 콘벤디트와 요시카 피셔처럼 단지 훌륭한 제도권 정치가로 변신하거나, 심지어는 극우적인 행태까지 보이는 경우도 있다. 우리 시대의 혁명은 어떠한 시대이든지 그 시대를 사는 개인들에게 외부에서 주어질 때보다 그들 내부에서 만들어질 때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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