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호 [시사쟁점] 귄터 그라스의 통일관
2003-04-04 16:00 | VIEW : 25
 
172호 [시사쟁점] 귄터 그라스의 통일관
제도의 통합을 넘어 머릿속 장벽을 제거하라

김누리 / 독문과 교수

귄터 그라스는 독일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동시에 독일통일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가장 치밀하고 일관되게 통일에 반대하는 논리를 제시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서독 좌파 지식인의 대변자이며 독일의 비공식적 양심 이라고 불리는 그라스의 통일관이 여기 지금 우리에게 왜 의미가 있는지 크게 다섯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자.

첫째, 그라스는 영토에 기초한 민족국가 형태의 통일을 반대하며 국가연합제의 다양성 안에서 문화민족으로 남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민족의 통일성을 지속적으로 담보하는 것은 체제가 아니라 결국 인간의 정신, 즉 문화라는 것이 통일에 대한 그의 지론이다. 통일이 제도의 통합이기 앞서 인간의 융합이어야 한다는 그라스의 주장은 우리에게 결코 남의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이제 한반도 통일 논의 핵심은 형식에서 내용으로 전환되어야한다. 국가연합이냐, 연방제냐 하는 국가형태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통일한국이 어떤 사회적 실체를 갖느냐하는 것이다. 남북한을 가로막은 외적 분단의 철거가 아니라 내적 분단, 즉 머리 속의 장벽을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이다.

둘째, 그라스는 국가연합을 서독체제로의 일방적인 흡수를 위한 전단계가 아니라 동서독 두 체제의 동시적 변혁을 위한 기회로 활용하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통일을 단순히 분단된 민족국가의 복원으로 생각하지 않고 바람직한 세계를 건설하는 기회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통일을 서독의 잘못된 자본주의와 동독의 잘못된 사회주의를 변증법적으로 지양할 수 있는 과정으로 보는 그라스의 시각은 우리의 입장에서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임에 틀림없다. 통일은 분단 상태 그대로가 하나 됨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는 통일을 남북한 양 체제를 동시에 변혁함으로써 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드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다시 말해 통일은 남한의 권위주의적 자본주의와 북한의 권위주의적 사회주의를 동시에 극복하는 제3의 길을 찾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셋째, 그라스는 통일을 근본적으로 신자유주의의 기류 속에서 자본주의가 약탈 형태를 띠고 전지구적 차원으로 확대되는 세계화 현상의 일부로 해석한다. 다시 말해 그는 사실상 독일통일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과정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통일이 어느 정도 길들여졌던 서구 자본주의가 다시 미친개처럼 날뛰는 계기를 주었다고 본다. 통일을 통해 자유의 단맛을 즐기고자 했던 동독사람들이 정작 현실에서 맛본 것은 엄혹한 팔꿈치 사회가 제공한 자본의 쓴맛이라는 것이 그의 현실진단인 셈이다. 통일을 통해 자본주의가 더 노골적인 형태로 관철되면서 독일사회는 발전적 통합을 이루지 못하고 산산이 분열되어 버렸다는 그라스의 질타는 통일문제와 함께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야만에 직면한 한국의 지식인들이 지표로서 가슴에 새겨둠직한 말이다.  
          
넷째, 그라스의 통일논의에서 우리가 특히 주목해서 봐야 할 대목은 동독에 대한 지원을 서독의 일방적인 시혜가 아니라 역사적 부채를 탕감하는 당연한 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는 자신의 부채탕감론의 역사적 근거를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상황에서 찾는다. 그에 의하며 동독은 패전이 안겨준 부담을 홀로 걸머져야 했다는 것이다. 즉 그라스는 당시 훨씬 더 어려운 조건하에서, 즉 경제적으로 무능한 중앙집권적 관료주의 하에서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했던 동독의 상황을 지적하면서 가능한 한 아무런 사전 조건 없이 전면적으로 이 부채를 탕감해 주는 것이 서독의 의무라는 입장을 표명한다. 통일의 상대적 약자인 동독인들에 대한 그라스의 배려는 서독사람들은 노골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지난 40년간의 동독에서의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보도록, 무의미하고 실패한 것으로 보도록 동독사람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끔직하고 뻔뻔스런 태도이다라는 말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남한 사람은 북한 사람에 대해 또 북한 사람은 남한 사람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의 지난 삶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관용의 자세가 절실한 오늘날, 동독 사람들을 무시하는 서독 사람들의 오만함을 꾸짖는 그라스의 태도는 통일을 준비하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다섯째, 그라스는 통일을 겪으면서 독일 지식인들의 의식이 크게 변모한 것을 강도 높게 비판한다. 그는 이제 심각한 정치적 상황은 종료되었으며, 이념의 싸움터로서 역사는 종언을 고했으므로 지식인의 사회적 역할도 사라졌다는 일부 지식인들의 현실 도피성 발언에 반기를 든다. 비판적 참여 지식인의 면모를 끝까지 견지해온 그라스는 통일 후 지식인 사회에 만연된 전반적인 보수화 경향에 대해 이런 일침을 놓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 기형화하는 것은 이상과 언어의 전면적인 부재이다. 그라스의 이러한 외침은 오늘 정체성의 위기에 빠져 방황하는 혹은 절망한 한국의 지식인들을 내려치는 따끔한 죽비소리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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