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호 [사회기획] 국가정체성 ② 가부장제, 국가주의의 부산물
2004-11-03 09:00 | VIEW : 150
 



[사회기획] 국가정체성


가부장제, 국가주의의 부산물


 



글 싣는 차례      
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
② 가부장제, 국가주의의 부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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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본 기획은 최근 벌어지는 국가정체성논쟁을 국가와 개인과의 관계맺음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개인을 기반으로 한 국가가 어떻게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지, 그 억압의 한 측면으로 가부장제가 사회내에서 어떻게 개인을 억압하는지 현안을 중심으로 바라본다. 이를 통해 국가주의가 팽배한 한국사회에서 개인을 근거로 성립되는 근대국가의 유의미성을 고찰하고 국가와 개인과의 관계를 정립하고자 한다. 국가의 존립근거는 개인으로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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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정 / 여성문화이론연구소 연구원

가부장제는 각 사회와 문화에 있어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기에 하나로 정의하기 어렵다. 후기 근대를 살고 있는 여성은 더이상 부족의 출계를 이어가기 위해 교환되지 않지만, 남성자본가가 소유하고 있는 기업의 상품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시간당 고작 몇 천원을 받고 대로변에서 춤을 춘다. 서구 국가들에서는 사적영역의 가부장제가 점차 공적 영역으로 옮겨가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 반면,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들, 특히 한국에서는 아직도 사적 가부장제의 모습이 강해 일하는 여성은 공적 영역에서의 노동과 사적 영역에서의 가사와 양육부담의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가부장제는 개인의 몸을 관통하여 실천되고 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지극히 사적인 영역, 즉 사랑, 연애, 성, 결혼, 출산을 비롯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 이르기까지 복합적이고 중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가부장제, 국가주의와 만나다
가부장제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역사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분석과 이론화 작업이 있어왔고, 모든 학문적 작업은 생물학적 ‘여성’이 생물학적 ‘남성’과 동등하게 인식되지 않고, 가정과 사회에서 다른 역할이 주어지며 다르게 배치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로써 여성은 다양한 기질과 재능, 성향을 갖는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남성의 성적 쾌락의 대상으로, 출산하는 몸으로, 보살피는 어머니로 환원되고 본질화되어감을 살피고 있는 것이다.  
엄밀히 따지면 가부장제는 근대 국가주의 등장 이전에 존재했으므로 국가주의의 부산물은 아니다. 따라서 이 글은 가부장제와 국가주의의 만남 내지 동맹에 관한 것이다. 국가주의란 개인의 존립 기반을 국가에 두고 모든 행동원칙에 있어 국가를 우선시하는 것이다. ‘국갗란 단어는 마치 모든 방의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처럼 개개인의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는 ‘나’의 책상 서랍을 열고, ‘나’의 침실을 뒤지며, ‘나’의 화장실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것이 국가의 이름으로 잘 정돈되어 있는지 살핀다. 이런 국가는 분명히 ‘개인’을 ‘개인’으로 존재하도록 절대 내버려두지 않는 전제적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제적 얼굴은 상당히 젠더화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즉, 국가주의는 성별화된 정치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으며, 국가주의적 행위는 성차별적 효과를 지닌다. 다시 말해 국가주의는 ‘개인’에게 억압적이지만, 그 ‘개인’이 여성이냐 남성이냐에 따라 또 그 억압의 양상이 다르게 나타난다.
국가는 모든 개인들을 노동하도록 하지만, 노동시장에 있어서 여성의 접근 기회를 제한한다. 노동력이 필요할 때는 적극적으로 여성을 노동시장에 유입하지만, 임금에 있어서는 차별적이고 승진의 기회 역시 제한하고, 국가 경제 유사시 먼저 직장을 떠나야 하는 것도 여성이다. 또한 국가유지에 필요한 경제활동인구를 조절하기 위해 통제하는 것도 남성의 몸이 아니라 여성의 몸이다. 인구 통제의 필요가 있을 때 한 번이라도 ‘남성이여 섹스를 하지 말아라’는 슬로건을 들은 적이 있던가. 과거 수많은 어머니들이 임신중절을 하지 못해 수은을 마시고, 배를 돌로 쳤다. 국가는 남성은 늘 발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존재로, 여성은 스스로 알아서 조신하게 처신해야 하는 존재로 전제했기에, 남성의 ‘자연스런 발산’에 의해 임신한 여성이 난산이나 임신중절로 죽어가도, 가정 폭력에 시달려도 국가는 이 모든 것을 여성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버렸다. 여성이 경제적으로 독립할 가능성을 최소화하는 국가는 남편과 국가로부터 생계를 보호받지 못한 여성이 아이와 동반 자살을 해도 이것을 여성을 타자화시키는 가부장적 사회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단지 ‘비정한 모정’으로 규정하고 혀만 끌끌 찰뿐이다. 이쯤되면 국가정체성은 그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 국가정체성을 논하는 자는 바로 개인, 그리고 여성이 국가의 정체성과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논해야 할 것이다.

모든 체제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남녀고용평등법이 실시되고, 여성 국회의원수가 증가하고 있다고 해서 개인을 포섭하고 있는 국가주의의 위력이 그리고 그 속에 지속적으로 여성을 범주화하고 있는 국가주의의 가부장적 본질이 상쇄되지는 않는다. 최근의 성매매 단속 문제를 통해 우리는 국가의 가부장적 모습을 극명하게 본다. 한 ‘나라’의 국회의원인 한나라당의 김충환 의원은 성매매를 단속할 경우 “18살에서 30살까지 성인 남성들이 무려 12년 동안이나 성관계를 가질 기회가 없어질 것”이라고 성매매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발산하는 남성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전제하는 이 발언은 그러나 성매매 특별법 시행 후 성을 사고 있던 남성의 63%가 기혼 남성으로 나타남에 따라 무색해졌다. 국가가 여성의 성을 파는 일에 직간접으로 관여해 온 역사는 짧지 않다. 박정희 정권 때의 기지촌의 묵인과 양성, 외국인관광시설업협회의 외국 여성 접대부 유입과 그들에 대한 비자 발급은 국가가 여성의 성을 남성 구매자를 위한 상품으로 보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우에노 치즈코는 <내셔널리즘과 젠더>에서 “민족이란 개념도 국가란 개념도 그 속에 여성이나 다른 소수자에 대한 억압을 내포하고 있다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단호히 말하고 있다. 우리가 국가 안에 함몰되어 있는 개인을 들어내고, 그 개인 안에 수많은 여성과 소수자들이 있음을 소리 높여 주장하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개인으로서의 삶을 부여받은 각자가 모든 체제적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자유는 모든 범주화와 그 범주의 본질화를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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