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호 [사회기획] 참여정부 빈곤정책 비판
2004-12-05 01:19 | VIEW : 326
 
207호 [사회기획] 참여정부 빈곤정책 비판

 


일을 통한 빈곤탈출’정책의 허구성


이정면 / 사회당 정책위원

IMF 외환위기 이후, 한국의 빈곤의 문제는 과거의 기준이었던 절대적 빈곤을 넘어 ‘사회적 빈곤’으로 확대되었고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통상적으로는 ‘신빈곤’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이와 더불어 일할 능력과 의지가 있으나 잦은 실직과 낮은 소득 때문에 일을 하더라도 빈곤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계층을 지칭하는 ‘근로빈곤층(Woking Poor)’이라는 용어 역시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이러한 ‘근로빈곤층’의 규모는 줄어들지 않고 계속 확대되어 전체 빈곤층의 33.5%인 109만명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들이 부양하고 있는 가구원을 합하면 전체 빈곤층의 61.6%인 200만명에 이르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근로빈곤층’의 문제가 갖는 심각성은 점차 더해가고 있다.
정부는 만연한 사회문제로써 빈곤, 특히 ‘근로빈곤층’의 문제를 심각히 인식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해왔으며 “근로빈곤층에게 단순히 생계비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근로의욕과 능력을 고취시켜 자립하여 빈곤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는 기본 방향을 설정하였다. 그리고 이달 10일 국정과제 회의를 통해 ‘일을 통한 빈곤탈출’ 지원정책이라는 근로빈곤층에 대한 사회정책의 기본방향과 주요 정책을 재확인하였다. 정부정책의 핵심은 EITC(Earned Income Tax Credit)의 도입으로 이는 1975년 미국에서 도입된 사회보장과 조세체계를 연결하는 제도로서 일정소득을 가진 자에 대해 정부가 정해진 기준에 의거하여 지급공제액이 세액보다 크면 차액을 현금으로 환급해 주는 제도이며 소득이 증가할수록 공제액을 크게 하여 정상적인 일자리로의 취업을 촉진하도록 설계되어있다.


왜 일을 통한 빈곤탈출을 강조하는가

먼저, 제도가 도입되고 있는 배경을 살펴보면 그 내막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참여정부가 내걸고 있는 ‘일을 통한 빈곤탈출’정책은 미국식 노동연계복지정책(workfare)을 그 토대로 하고 있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빈곤층이라고 하더라도 근로능력이 있으면 현금급여를 제공하는 공공부조의 수혜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을 원칙으로 해 왔다. 미국에서 노동능력자에게 현금급여가 제공되던 유일한 공공부조는 AFDC(Aid to Families with Dependent Children)로서 아동이 있는 빈곤여성(single mother)에게만 급여를 지급하였으나 80년대 복지개혁 이후에는 AFDC를 TANF(Temporary Assistance for Needy Families)로 전환하여 공공부조의 역할과 범위를 축소시켜 그 조건을 더욱 까다롭게 하고 평생수급기간을 최대 5년으로 제한하며 근로관련 활동 참여 및 취업을 의무화하였다.

한편 클린턴 행정부에서는 공공부조 성격이 강한 EITC를 대폭 확대해 취업자를 지원하여 실직자의 취업을 유도하였다. ‘02년 현재 연방정부의 EITC 예산은 358억 달러로서 전통적인 공공부조인 TANF의 예산(01년: 245억 달러)’보다 훨씬 많다. 결국, 미국식 노동연계복지는 복지수혜자를 복지명부에서 제거함으로써 복지의 책임을 다시 사회에게 개인에게로 전환시키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참여정부 역시 ‘근로빈곤층’이 야기된 원인의 하나로써 한국사회에서 일자리의 양극화가 급속히 진행되어 임시직·일용직 및 비정규직의 대량 확산을 지적하였다. 그런데 정부의 해결방법은 ‘일을 통한 빈곤탈출’이다. 일을 하면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것은 무척 그럴듯해 보인다. 그 자체로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그 실체는 곧 드러난다. 문제는 일자리의 성격이다. 불안정한 노동으로 인해 안정된 삶이 위협받고 있는 현실이 문제의 원인라고 지적한 뒤, 빈곤을 탈출하기 위해서 다시 일을 해야 한다니 그들이 말하는 일자리는 저임금과 반실업상태를 유지하는 불안정한 일자리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면 자신들의 행위가 어떻게 귀결될 것인지조차 모르고 있던지! 따라서 그들의 논리구조에서 노동자는 빈곤을 탈출하기 위해 또다시 빈곤을 양산하는 불안정노동의 늪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기초생활 보장 없는 노동강요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대상을 노동무능력자에게로 축소·국한시키고, 노동능력자에게는 EITC제도를 도입하여 적용하겠다는 노동자에 대한 분할통치적 방식은 결국 노동력의 착취를 더욱 극대화하여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겠다는 것에 다름없다. 앞서 언급한 미국의 사례가 이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지금 미국의 노동능력자는 생계를 보장받기 위해서 저임금의 고된 노동을 경쟁적으로 강요받고 있다. EITC의 도입은 결국, 한국사회에서 노동시장 유연화를 더욱 고착화하는 방안으로 귀결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노동법 개악 등 극도의 노동시장유연화 정책을 통해 저임금의 불안정노동과 실업을 끊임없이 양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양산된 대규모의 실업이나 빈곤에 빠져있는 사람들에게 노동시장 재진입을 유도하는 것은 결국 그들에게 또다시 실업과 불안정 노동을 강요하는 것에 불과하다. 이것은 진정한 의미의 자활이나 자립이라고 할 수 없다. 근로빈곤층에게 직업 및 기능교육을 실시하여 근로능력을 향상시키고 각종 세제혜택을 통해 근로의욕을 고취시키는 것은 안정된 일자리가 보장될 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보장되어야 할 것은 안정적 일자리, 즉 고용이 안정적이고 현실화된 최저임금을 넘어서는 일자리와 복지차원에서는 공공부조를 엄격히 제한하고 저임금의 불안정노동을 강요하는 복지가 아니라 최저생계비와 최저임금을 재조정하여 빈곤선을 현실화하고 빈곤선 이하의 사람들에게는 현물 및 현금서비스를 보편적으로 제공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단순한 일자리 확보가 아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안정적 일자리’의 확보를 요구해야 한다.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임금이 안정적 일자리를 통해 가능할 수 있는 구조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여전히 노동시장 유연화와 비정규직 철폐가 핵심적인 투쟁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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