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호 [사회문화기획] 현대사회의 감시와 통제
2005-04-07 03:45 | VIEW : 39
 




현대사회의 감시와 통제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해 새로운 감시기술이 끊임없이 개발되고 있다. 현대사회의 새로운 형태의 감시는 서로가 정보를 공유하고, 서로를 감시하는 형태로 계속된다. 따라서 이번호에서는 푸코의 판옵티콘 논의를 바탕으로 현대사회의 감시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편집자주>


감시의 사회 대한민국, 그리고 판옵티콘




조항민 /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 석사





유명 여자 연예인의 사인회. 경호원을 대동한 그녀가 등장하자, 여기저기에서 디지털카메라의 플래쉬가 터지고 핸드폰 카메라를 들고 있던 어린 학생들의 손놀림이 바빠진다. 혹여 찡그리거나 미운 모습을 팬들에게 보일까봐 노심초사하던 그녀가 사라지면, 빠르면 몇 초 혹은 몇 분 후에는 이미 다양하게 편집된 그녀의 모습이 블로그와 미니 홈피를 통해 급속도로 퍼지게 된다. 절묘한 순간 포착으로 운좋게 망가진 모습의 사진이 포털 사이트에 뜨게 되면, 수백, 수천 개의 인신공격성 혹은 악의성 리플로 게시판은 홍역을 앓는다.


불과 십여년 전만 해도 앨범이나 잡지를 들고 수줍게 사인을 요청하던 팬들이 이제 디지털 기기로 중무장한 개인기자들로 돌변한다. 연예인들은 사진 기자들의 플래쉬 세례보다 팬들의 플래쉬 세례를 더욱 신경써야 할 시대가 된 것이다. 디지털카메라와 휴대전화 카메라의 보급과 성능향상으로 이제는 어떤 장소든 누구나 타인을 촬영하고, 촬영하는 나 역시 부지불식간에 타인의 촬영 대상이 될 수 있게 되었다. 연예인들이나 유명인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한순간의 실수로 유머카페나 엽기카페에서 네티즌들의 조소거리로 등장할지 모를 일이다.  


인터넷, 디지털 강국에 살고 있다는 것은 개인에게 기대 이상의 많은 정보 소유와 자유로운 정보 공유를 동시에 가능하게 해 주었다. 특히 여러 분야에서 선진국의 뒤를 쫓아가기 바빴던 우리에게 ‘인터넷 보급률 세계 1위’, ‘디지털 강국’, ‘IT 강국’등의 생소한 감투는 섣부른 규제보다 더욱 풍부한 자유로움을 선사해 주는데 일조했다. 또한 정보사회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인 ‘낙관론’과 ‘비관론’중 비관론은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그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보화 사회가 주는 장밋빛 미래의 이면에는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개인정보 유출과 프라이버시 침해라는 문제점이 내포되어 있었고, 연예인 X파일 사건, 왕따 동영상 유출로 인한 학교장 자살 사건 등 소위 ‘감시의 콘텐츠화’로 인한 많은 부작용들이 불거져 나오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제 음울한 전자 감시사회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빅브라더’에 대한 공포감보다 도처에 편재해 있는 익명의 감시자들인 소위 ‘스몰 브라더’들에 대한 두려움이 더욱 커지게 된 것이다.




 

현대 사회의 판옵티콘




미셸 푸코는 한 사람의 간수가 모든 죄수를 감시하는 원형감옥인 판옵티콘의 개념을 도입하여 60년대부터 부상한 전자 감시나 정보 감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실제로 이런 판옵티콘 속에 구현되어 있는 감시의 원리는 사회 전반으로 스며들고 있으며, 이제 규율 사회의 기본원리인 판옵티시즘으로 탈바꿈되고 있는 상황이다. 정신병원과 교도소라는 일부 물리 공간에 적용되던 판옵티콘은 이제 전자시대의 도래로 인해, 물리공간과 전자공간을 넘나들며 그 영역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문제는 정보화 시대로 일컬어지는 현대 사회에서 판옵티콘의 긍정적 감시 기능보다는 부정적 감시 기능이 더욱 도드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루가 다르게 향상되고 있는 감시 도구들의 성능 - 예컨대 휴대용 디지털 카메라의 성능향상과 마이크로화, 초소형 CCTV의 등장 등 - 과 더불어 감시 콘텐츠를 인터넷, 모바일 콘텐츠의 하나로 즐기고 향유하는 문화적인 인식변화에서 기인한 바 크다.
이렇게 ‘감시’는 과거와 같이 정보기관이나 거대 권력기관을 연상케 하는 우리 생활과 동떨어진 용어가 아니라, 여중생의 핸드폰 카메라와 이웃집의 쓰레기 무단투기를 감시하기 위해 담 내부에 설치한 CCTV에 쉽게 투영시킬 수 있는 용어가 되어 버렸다. 그만큼 감시 대상은 다양해졌으며, 감시방법도 쉬워졌고, 피감시자와 감시자의 신분 구분은 모호해졌다. 이는 콘텐츠 생산자와 콘텐츠 소비자의 경계가 사라진 인터넷 문화와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즉, 이제는 첨단 감시도구의 발전과 감시에 대한 사회·문화적 용인과 거부감 완화로 감시 콘텐츠 생산자와 감시 콘텐츠 소비자의 경계가 사라지게 됐다는 말로 그 의미를 확대 해석해 볼 수 있겠다.




감시사회의 역기능




문제는 이런 감시의 만연화가 아무 거리낌 없이 우리 생활 속에 젖어들고 있는 것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개인에 대한 인권 침해적인 부분들이 감시의 만연화와 일상화로 인해 무감각해 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부분들은 전자사회의 특징인 익명성이 담보되면 더욱 철저히 간과되고 있다. 감춰진 부분을 캐내고 싶어하는 그리고 금기시되는 부분을 눈앞에 현시시키고 싶은 관음의 욕망이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핸드폰 액정화면을 통해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음란동영상 유출과 개인에 대한 유언비어 유포 등이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정보기술의 발전은 이렇게 개인의 사생활 영역까지 위협을 가하고 있으며 이는 비단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정보통신 기술이 가져다주는 유토피아적인 모습이 더욱 크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이다. 게다가 이제 정보 수용자와 정보 생산자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윤리적 잣대를 일일이 개인에게 들이대며 감시 콘텐츠의 생성을 막아내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이 돼버렸다.  


무분별한 감시 콘텐츠의 난립 등 상식적인 도덕적 규제가 사라진 가상공간은 범죄가 만연한 현실 세계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탈중심화와 민주화의 물결에 이런 감시의 순기능이 큰 기여를 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총체적으로 판단할 때 생산자의 양산화와 익명성의 보장으로 인해 비윤리적이고 반사회적인 감시 콘텐츠의 생성을 근원부터 막아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건강한 사회를 이루는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이러한 감시사회의 역기능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도 소극적인 감시 콘텐츠 향유자에서 비윤리적이고 반사회적인 감시 콘텐츠의 적극적 감시자로 나설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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