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호 [사회이슈] 한국 노동운동의 전망
2005-05-15 19:03 | VIEW : 46
 

노동운동 주체혁신이 절박하다

김준오 / 전국노동자회 교육위원장요즘 누구나 노동자운동의 위기를 말한다. 기아자동차 노조의 취업비리나 사회적 교섭을 둘러싼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의 격돌, 그리고 각 연맹이나 지역본부 선거의 파행 등을 보면서 노동자운동의 위기를 말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최근 민주노총의 그 누구도 자신있게 총파업 등 자본과의 정면격돌을 선언하지 못한다. 문제는 그 이유가 단지 ‘지도부가 개량적이라서’라는 말로 치부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당장 벼랑 끝에 내몰린 비정규직 노동자를 제외하고는 어느 현장에서도 투쟁의 동력을 찾아보기 힘들다. 노동자의 집회는 각종 문화행사와 진정성을 믿기 힘든 구호와 연설로 채워지고, 노동자운동의 가장 열성적인 움직임은 노조 간부를 뽑는 선거에서만 보여진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대의와 무관하게 자기이익을 위한 권력다툼이나 님비현상에서 비롯된 집단적 행위들을 운동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권력으로서의 노조’를 둘러싼 일들을 ‘노동자운동’이라고 부르는 것도 관성적인 표현에 불과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노동자 현실의 고통과 노동자가 근본적으로 지향해야할 가치를 부정하지 않고 ‘운동다운 운동’을 해나가려 한다면, 한국의 노동자들이 부딪치는 ‘노동자운동의 위기’라고 지칭되는 그 상황은 반드시 극복해야할 문제이다.


대부분의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이 투쟁을 전개하여 쟁취한 단체협약의 대부분은 지난 IMF 이후 심각하게 위축되고 개악되는 상황에 있다. 노동자 권익의 지속적인 후퇴는 단지 비정규직의 증가나 정리해고 등의 핵심 쟁점에서만이 아니라 퇴직금, 학자금, 임금, 노동자의 경영참가 등 총체적인 권리위축으로 귀결되었다.




노조 관료화와 현장 조직력 약화

96~97년 이후 노동자운동의 문제는 단지 자본의 공세 앞에 노동자의 방어가 약하다는 수준의 문제를 넘어 방어진영 자체가 무너져버렸다는 데 있다. 최근 수년간 오랜 전통을 가진 노조 치고 결의에 찬 파업투쟁을 전개한 노조는 거의 없다. 기껏 발전이나 철도와 같이 민주노조의 대열에 새롭게 합류한 노조가 그 여세로 잠시 투쟁의 기운을 발산했을 뿐이다. 노조 투쟁력의 핵심은 지도부의 의지와 노동자의 단결이다. 흔히 노동자운동의 위기를 말할 때 거론되는 ‘노조의 관료화와 현장조직력의 약화’는 그 두 가지 요소가 모두 붕괴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실 두 요소의 선후를 말하는 것은 곤란하다. 두 요소는 자본의 공세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된 것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결과를 말하자면 노동자운동의 각 현장조직은 조합권력을 둘러싸고 그 주도권을 다투며 그 자체가 자본에 의해 관리되는 권력이 되고, 현장 노동자도 각자의 살길을 찾아 노조나 관리자에게 개별의 생존과 이익을 청탁하는 구조가 정착되었다. 따라서 오래된 노조의 활동가일수록 개별 이익을 위한 자본과의 거래에 익숙하다. 오래된 노조일수록 거래의 관성대로 투쟁보다 교섭에 매달리고 단체협약상의 근본적인 권익과 눈앞의 이익을 교환하는 일이 태연하게 벌어진다.


이렇게 ‘노동자의 단결된 힘으로 노동자의 권익을 향상한다’는 노조운동의 기초명제마저 무너지는 판에 노동해방이라는 노동자의 근본적인 지향이 자리를 찾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노동자운동의 현장조직 대부분은 어용이건 민주파건 조직의 규약이나 강령에 노동해방을 명시하고 있다. 물론 그 대부분의 현장조직이 투쟁보다 거래에 익숙하다. 그들에게 ‘노동해방’이라는 단어는 단지 관용어에 불과하다. 최근 전개된 ‘사회적 교섭, 혹은 사회적 합의주의’ 논란은 구석에 처박힌 노동해방운동 처지를 단적으로 표현한다. TV와 신문 등 언론매체들이 열심히 떠들어댄 유럽의 사례처럼 사회적 합의주의는 결국 자본의 위기에 자본과 노동자가 공동으로 대처하자는 말이다. 현재 한국의 자본주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산업공동화’나 ‘제2의 IMF’같은 정부와 자본의 엄포는 어느 정도 진실을 담고 있다. 문제는 그래서 노동자운동이 ‘한국 자본주의 살리기’에 나서야 하는가에 있다. 노동해방운동은 자본주의의 위기 속에서 확장되고 승리의 조건을 만들어나간다. 반면 노동해방의 가치와 멀어진 순수한 노조운동은 자본주의를 그 생존조건으로 한다. 사회적 합의주의를 바탕으로 한국자본주의 살리기에 나선 민주노총의 모습은 노동해방의 가치와 멀어진 노조운동의 현실을 반영한다.


다시 주체의 문제로

최근 노동자운동에는 ‘뭔가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는 혁신의 흐름이 감지된다. 사실 그것은 현재의 노동자운동을 위기라고 말하는 것의 연장이다. 위기는 극복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자운동을 혁신해야 한다. 문제는 혁신의 진정성 그리고 혁신의 출발점이 무엇인가에 있다. 결국 그것은 내용과 주체의 문제다. 최근 새롭게 형성되는 혁신 흐름에는 정파적 세력에 대한 불신이 전제되어 있다. 그래서 혁신논의는 주체보다 혁신의 내용, 즉 자본의 공세에 맞설 노조운동의 정책에 집중된다. 그러나 주체란 단지 어떤 일을 할 사람의 뜻만이 아니라 책임의 소재를 포함하며, 혁신운동의 진정성을 뜻한다. 나아가 조합주의에 경도된 현실의 노동자운동을 바꾸는 출발은 결국 노동해방의 지향을 가진 확고한 주체의 형성이다. 노동해방을 지향하는 노동자운동은 이제 기존의 관성으로부터 벗어난 새로운 주체의 형성을 고민하는 시점에, 즉 새로운 출발의 시점에 서 있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