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호 [사회문화기획] 청소년 인권 문제
2005-05-31 15:45 | VIEW : 45
 




청소년 인권 문제




최근 중·고교생들의 ‘두발 자유화’에 대한 논쟁이 분분하다.
학생들은 ‘전국 중·고등학생연합’을 만들어 인터넷으로 두발 제한 반대
서명을 했고 두발제한 폐지를 요구하며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번호에서는 두발자유를 바라보는 우리사회의
시각과 청소년인권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인권은 이미 교문안에 있다




전지현 / 연분홍치마 활동가





지난 7일에 광화문에서 열렸던 “입시교육에 희생된 학생들을 위한 추모제”에 주최 측의 예상 보다 훨씬 많은 1천여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그 자리에는 7백여명의 교사들과 교육부 관계자, 6천여명의 경찰, 1백여명의 취재진이 함께 했다. 학생들은 이들의 과도한 관심과 반응을 불편해 하면서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9일, 교육부는 14일 행사를 주최하는 청소년 단체 활동가들을 모아 일선학교에 교육 주체들과 협의하여 학교 규정을 개정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어떻게든 두발 문제를 해결 할 테니 제발 집회 계획을 취소해 달라고 간청했다. 14일, 학생들은 다시 한번 광화문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따라 나온 불청객들에게 보란 듯이 외쳤다. ‘우리는 3cm 규정을 5cm로 늘려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 대한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달라고 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두발규제의 반교육적 효과




어른들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학생들의 미성숙함을 지적하며 일탈, 탈선에서 학생들을 보호하고, 학업에 열중하기 위해서는 규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반인권적으로 규제를 하는 곳은 많지 않으니 오버하지 말라고 덧붙인다. 한 발 물러서 시대가 바뀌었으니 교사, 학부모와 신중히 합의하여 일부 규정에 대해 개정할 수도 있다고도 한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보다 솔직하게, “두발 규제를 풀어주면 시험도 안 보겠다. 공부 안하겠다. 학교 안 다니겠다” 며 단호히 잘라 말하는 이도 있다. 두발규제가 보호의 탈을 뒤집어 쓴 통제의 수단임을 교사들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교사들은 바리깡을 들고 학생들의 머리를 질주한다. 그것도 모자라 라이터로 머리를 날려버린다. 그리고 이 때 학생들은 도살장에서 한 줄로 세워져 털을 깎이는 가축 신세가 되는 동시에 다른 사람의 인권과 존엄을 무시하는 법을 체득한다.




청소년들이 ‘KIN’을 날릴 수밖에 없는 이유




푸코가 그랬다. 근대 사회는 권력을 가진 규율을 통해 주체를 억압적인 틀 속에 가둬둔다고. 그것도 아주 은밀하고 교묘하게. 짜여진 시간표, 성적으로 한 줄을 세우기 위한 시험, 학교-교사, 교사-학생의 위계적인 권력 관계를 빼다 박은 선-후배 관계, 공동체 의식의 함양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는 교복, 두발과 같은 각종 용의복장 규정에서부터 ‘효’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권위적인 부모-자녀 관계, 청소년의 건강과 안전을 도모한다며 각종 규제 조항을 모아 놓은 청소년 보호법에 이르기까지 청소년들은 교묘하게 포장된 가정과 학교와 국가의 규율과 시스템에 그들의 권리와 욕망을 끝도 없이 내어 주고 있다.


하지만 청소년들은 “학교의 주인은 너희들이야. 너희가 책임져야지.” 라며 청소 당번을 정해주면서, 스스로 외모, 가치관, 진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책임지려는 것을 “미성숙하기에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없다”는 말로 유보시키는 어른들의 실체를 알고 있다. 18세는 판단력이 부족하므로 정치에 참여할 권리는 줄 수 없지만 신체적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군대에 가서 총을 들고 사람을 죽이는 법은 가르쳐 줄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들의 모순을 알고 있다. 청소년들은 어른들이 자신들을 상대로 사기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시스템에 순응할 때 건전한 청소년 대우를 받을 수 있고, 자신의 주장과 소신을 펼칠 때 교사와 성인들로부터 왕따를 당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국가의 청소년정책이 매우 바람직하게 청소년들의 참여와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감에도 불구하고 청소년들이 이를 보고 나이키 웃음과 ‘KIN’을 날리며 ‘장난 하냐’고 중얼거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바리깡은 이제 그만, 꼰대도 이제 그만




현재 청소년들의 요구는 매우 명확하고 구체적이다. 두발자유, 학생회 법제화, 학교 운영위원회 참여, 반인권적 학교 규정 삭제 등 신체, 표현의 자유와 같은 보편적 권리와 함께 자신과 관련한 것들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자기 삶의 주체임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이들의 구호는 80년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와 2000년의 ‘No, Cut!’을 경유하며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현장의 일부 교사들이 털어 놓듯이 학교와 교사들의 억지 논리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청소년들은 02년 월드컵과 촛불시위를 통해 광장과 평화적인 집회 문화에 익숙해졌다. 세상이 변화해 가는 모습을 그 누구보다 빠르게 감지하고, 너무도 당연하게 인권을 이야기 한다. ‘시범케이스로 한 놈만 잡아’ 몽둥이찜질을 한다고, 속치마 검사를 핑계로 치마를 들춘다고 해서 교실이 통제되고 자신들의 우월한 위치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이라는 무모한 자신감을 버려야 한다. 그런 자신감은 이제 모든 청소년들 손에 들려진 폰카만이 환영할 뿐이다. 언제나 교문 앞에 멈춰 서 있을 줄로만 알았던 인권이 어느 새 교문 안으로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분명 청소년들은 어리다. 하지만 성숙과 미성숙을 끊임없이 구분하는 기성세대의 잣대를 들이대더라도 결코 미성숙하지 않다. 오히려 미성숙함은 모든 변화의 가능성을 부정한 채 그 잣대를 들이대는 이들이 고민해보아야 할 문제다. 청소년들은 성인들과 토론하고 대화 할 모든 논리와 준비가 되어있다. 그렇다면 어른들도 바리깡을 움켜쥐고 학생들을 상대로 한 사기 행각을 계속 할 것인지, 무기를 내려놓고 이들과 대화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청소년들은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어 줄 어른들이 있다고 믿으며, 그들의 의지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꿈을 버리지 않았다. 이제 어른들도 누구처럼 어감부터 거북스러운 ‘꼰대’ 대신 ‘친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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