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호 [사설 2] 왜 '타이타닉'을 보지 말아야 하나
 
 

104호 [사설 2]

왜 '타이타닉'을 보지 말아야 하나


 

IMF시대에 따른 일련의 변화들을 보면, ‘도대체 우리가 제대로 가고는 있는건갗하는 의심이 들기에 충분하다. 영화관에선 난데 없는 대한뉴스를 통해 ‘김대중 찬갗가 울려퍼지고, 김대중 대통령은 90% 이상의 지지도를 바탕으로 김종필 총리 만들기에 적극 나서고 있다. 헌법의 울타리는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직배영화 ‘타이타닉’에 대해 “보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이 불길처럼 번지고 있으며, 언론 주도의 ‘금 모으기 운동’에 동참하지 않으면 매국노가 되는 듯한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사실 타이타닉을 봐야 하느냐, 금 모으기 운동을 하지 말아야 하느냐 따위의 논란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려스러운 점은, 논란이 전개되는 양상이 너무도 일방적이라는 사실에 있다. 즉 여기에 반대하는 입장은 도덕적으로 커다란 결함이 있는 것처럼 매도되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방통행이 가능해지는 기저에는 최근 경제위기에 따른 불안감이 자리잡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불안할 때면 파시즘이 등장한다”는 통설을 들먹거리는 견해도 일면 타당하게 다가온다. 그러고 보면 얼마 전부터 향수를 불러모으고 있는 박정희 망령도 예사롭지 않게 느껴진다. 무리하게만 보이는 김대통령의 김종필 총리 만들기도 이러한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면 너무 무거운 혐의를 덮어씌우는 것일까.

역사적으로 볼 때, 위기에 대처하는 우리 국민의 능력이 탁월한 것은 널리 입증된 바다. 이런 위기 관리 능력이 지금에도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가 개인의 자율성이니, 시민사회니 떠들어 대는 것에 대해 집단에 근거한 우리 나름의 ‘사회상’을 그려볼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제 담론들을 주워모아 주체의 위기를 논하는 것이 어느 만큼이나 현실 설명력이 있는가를 따질 수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얘기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집단 의식이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대척점에 설정할 성질의 것이 아닌 바에야 논의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최근의 분위기 속에서 자신 스스로에 대한 철저한 성찰이 요구되는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근본적인 성찰이 동반할 때만이 전통적인 집단 의식이 의미있게 복원될 수 있을 것이며, 어떠어떠한 목적 아래 맹목적으로 휘둘려지지도 않을 것이다. ‘타이타닉을 보지 말아야 한다’, ‘금 모으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입장이 타당한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서도 이는 필요할 수밖에 없다. 또한 성찰의 결과는 합리적 의사 소통을 통해 상호수정이 가능해져야 할 것이다.

근대성·탈근대성 논의가 진행될 당시 대다수의 학자들은 우리 나라의 발전 상태를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 규명한 바 있다. IMF시대에 이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특징, 특히 전근대의 단초들이 두드러지는 경향은 조심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세계 역사는 “사회가 불안할 때 파시즘이 등장한다”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타이타닉을 볼 것이냐, 말 것이냐’는 이러한 설정을 전제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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