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호 [사설] 국제성의 바탕은 ‘연대’
 
 

145호 [사설]

국제성의 바탕은 ‘연대’

 

'세계화’라는 개념이 정책적 의미로 사용된 것은 남한의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희극적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엄밀하게 따지면 글로벌라이제이션의 번역어로서 세계화는 관계공간의 확대를 의미하는, 상대적으로 정적인 개념으로 통용된다. 하지만 이와 혼동하여 사용되는 국제화라는 것은 그와는 다르게 방향성을 지닌 동적 개념으로 위치 지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생각하면 근자에 유행하고 있는 남한의 국제화 바람은 많은 부분 출발점을 망각한 근거 없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국제행사의 경향은 초대하는 주체는 망각되고 단지 초대된 인사들의 명성만이 그와 같은 행사의 정당함을 부여해주고 있다. 이는 우리에게 만연된 종속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반면에 그와는 다르게 형성된 국제화의 흐름은 국제성 본연의 모습을 어느 정도 환기시켜주고 있다. 시애틀과 프라하 그리고 서울로 이어지는 일련의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이 그것이다.

위의 두 가지 사례를 보면서 국제성의 한가지 원칙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은 연대성이라는 것이다. 연대는 누군가 동일한 목적지향 하에 위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본적으로 자기 입장이 있어야 누군가와 같이 선다는 것이 가능하다. 우리가 행동의 반경을 전세계로 확장시키는 작업은 그 넓어진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 그리고 행동의 주체가 어떠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유기적 구성을 꾀하고 있는지를 우선적으로 고려할 때만 유의미할 수 있다.

이점에서 본다면 전자의 국제성은 기실 인물의 국제성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에 후자는 인식 지평의 국제성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신문이 이번 ‘국제성’ 기획을 통해서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한 것이다. 이를 최근까지 폭주하고 있는 각종의 ‘국제적’이라는 수사에 비추어 간접적으로 살피고자 하는 것이다.
기형적인 남한의 국제성 이해는 최근의 주미대사 망언에서 보듯이 ‘자기’없는 기능인을 우상시하는 것으로 귀결될 뿐이다. 연대는 필연적으로 세계에 대한 공통이해를 이끈다. 이러한 공통이해가 진정한 세계인을 구성하는 필수요소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세계인이 될 것인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적절한 시간대에 있다. 그것은 필연의 결과 이전에 선택의 문제로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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