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호 [사설] 스스로를 돌아보자
 
 

146호 [사설]

스스로를 돌아보자

 

서울의 한 중심에서 ‘자본의 세계화’를 둘러싸고 한 충돌이 있었다. ‘하려는 측’은 제3차 ASEM 회의를 위해 모인 아시아·유럽의 정부 수반들이었고, 그것을 ‘저지하는 측’은 시애틀, 프라하 그리고 서울로 이어진 세계 민중들의 연대였다. 이미 ASEM에 참석한 이들은 축배의 잔을 든 지가 오래고, 그에 대항한 남한의 진보진영은 ‘전술의 부재’를 둘러싼 논쟁에 휩싸였다. 왜 유독 서울에서만 회의의 저지라는 최소의 목적이 달성되지 않았을까. 이유야 분분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여전히 남한이 경찰국가의 고유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노벨 평화상을 받은 대통령의 국가가 ‘경찰국갗라니 이는 무슨 얘기인가.

하지만 삼성역 일대의 집회를 정부가 종용하여 주변 기업들에 미리 신청하도록 한 사실과 실제 집회 당일 하늘을 끊임없이 맴돌던 경찰헬기를 생각한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집회자들을 경찰 병력으로 빙 둘러쌀 정도의 경찰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의 눈이 우리와 같다는 점은 남한의 경찰국가로의 성격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징집제를 바탕으로 하는 남한의 자위체제는 남한의 모든 민중들을 잠재적인 국가권력의 촉수로 만들었다. 작년 인터넷을 한참 달구었던 ‘군필자 가산젼 문제는 진보와 보수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균열 구조를 분명히 확인시켜주었다.

왜 나, 혹은 나의 다른 부분이 나와 끊임없이 대립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가. 그리고 나와 같은 눈을 지닌 그들이 나의 ‘적’으로 끊임없이 등장하게 되는가. 분명한 것은 이 구획선이 세계화를 반대하는가 아니면 반대하지 않는가라는 문제의식 이전에 국가권력의 내재화라는 과정에 놓여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시애틀, 프라하로 이어지는 흐름에서 그와는 다른 귀결을 보였다면 이는 분명 기형적인 애국주의와 이미 국가권력이 내성화된 ‘우리 자신’이 다른 곳에서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아셈 반대 투쟁의 한 귀결은 우리 자신에 대한 문제제기라고 생각한다.

여전히 집회는 집단의 문화이고 규율의 문화이며 그렇기 때문에 양적인 문화이다. 지난 20일 오전의 게릴라식 집회를 생각해 본다. 결국 거대한 성채를 무너뜨리는 것은 황소가 아니라 쥐라는 것을, 조금씩 그들의 축대를 허물어 나가는 시간의 싸움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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