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호 [사설] 죽은 자에 대한 푸념
 
 

152호 [사설]

죽은 자에 대한 푸념

 

지난 3월 21일 한국 경제의 거목이라고 불리던 정주영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소를 판 돈 70원을 훔쳐 무작정 서울로 달아나’, 매출액 100조 규모의 현대 그룹을 세운 그야말로 경제계에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그의 장례식에는 30만명이 넘는 조문객이 다녀갔다고 하고, 국내의 언론들은 연일 관련 보도를 싣고 특집기획을 며칠 간 싣기까지 했다. 적어도 그에게는 ‘정승집 개가 죽으면 사람들이 득실거려도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속담은 해당되지 않는 듯 하다.

이런 현상은 ‘죽는 마당에 무얼 못 들어주랴’와 같은 한국 사회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실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서 이래저래 왈가왈부하는 것은 그다지 당당하지도 보기에 좋지도 않다. ‘시체에 대고 하소연하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그러나 이런 분위기가 어디까지 적용될 수 있는가하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더군다나 그런 분위기가 언론에 의해서 조장되고 있는 것이라면 심각한 문제이다.

언론에게는 나름대로의 역할이 있고 그 역할은 무엇보다도 독자들에 대한 책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 정주영씨의 죽음에 대한 현재 언론의 보도 태도들은 그러한 책임에 합당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여기에서 언론의 성향에 대해서 논의하지 않는다는 전제조건에서, 이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먼저 정주영씨에 대한 해당 언론의 평가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정주영씨의 부고가 나간 후에 국내의 한겨레21 최근호에는 그에 관한 특집기사가 실렸다. 기획의 세부제목을 살펴보면 ‘한국경제의 카리스마가 지다’, ‘불도저같은 로맨티스트’, ‘위대한 수구초심’ 등이다. 이런 감동적인 제목은 안타깝게도 그의 자서전의 한 장의 그것이 아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 기사의 본문 내용을 살펴보자.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국내에서는 물론 전 세계가 신화라고 불렀다”로 시작하는 이 글에서는, “자연인 정주영이 가졌던 생활의 흔적”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지나, 후반부에 가면 “정경유착의 수혜자이자 정경마찰의 희생자로”라는 제목을 붙여가며 그의 행적을 표현하고 있다. 또 다른 기사에서는 그에 대해 “고정관념을 깨뜨린 직관형 야전지휘관”, “로맨티스트 정주영” 등으로 화려한 수사가 동원되고 있다.

여기서 그에 대한 평가에 관해 더 이상의 논의를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살펴보자. 과연 정주영의 ‘불도저같은 경영 방식’은, 현대의 성장에 촉매제가 됐던 ‘정경유착’은, 대북투자를 포함한 무리한 경영이 낳은 작금의 현대의 위기는, 그리고 수천명의 현대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고통은, 그의 죽음에 대한 감상적인 회고를 통해서, 죽은 자의 애도와 함께 무덤에 함께 묻을 수 있는 것들일까. 이에 대해 여기에서 대답하는 것은 단지 푸념일지 모른다. 그러나 제도언론에게 이것은 그리 어렵지 않은 부탁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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