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호 [사설] 爲己之學
 
 

160호 [사설]

爲己之學

 

오늘날 ‘개혁’은 하나의 수사와 방법을 넘어 목적 그 자체로 여겨지고 있다. 개혁은 부패와 정체의 대상일수록 힘을 얻는 바, 대학은 개혁대상 1호쯤으로 치부된다. 개혁은 이른바 ‘신지식인’으로 대표된다. 그러나 이는 일종의 수사일 뿐이다. 이러한 표현은 언제나 극복되어야 할 과거와 요청되는 미래를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대학은 애초부터 그 ‘이념’을 갖지 못한 채 외형만 빌려온 유령에 다름 아니며, 지금까지 줄곧 지속되어 왔다는 게 이 글의 주장이다.

융합될 지평도 역사적 단절도 없는 곳, 뿌리도 그 열매도 없는, 대학 아닌 대학 말이다. 대학은 우리에게 단지 출세와 신분상승의 도구였을 뿐이다. 물론 다소 역사적 굴곡이 있었음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박정희 시대 지식인의 모습과 신지식인 사이의 가파른 단절면을 찾기란 어렵지 않겠는가.대학에는 해체할 대상도 복구시킬 무엇도 없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논리적 아포리아에 빠지며, 결과에서 원인으로 끝없이 소급하는 무한역행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된다. 위기를 조장하거나 개혁을 주장하는 것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대학은 ‘없다’. 따라서 대학에는 위기도 변화의 필요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학은 만들어져야 할 무엇이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변화가 요청되기 때문도 아니다. 대학은 없지만, 연구하려는 자들과 이를 지도하려는 자들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옛 성현들은 올바른 공부로 爲己之學을 든다. 그러나 현대에 부적합한 修身의 맥락은 잠시 괄호치자. 오늘날 수신은 자기학대적인 매저키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글자 그대로 자기를 위한 공부. 이것이 대학을 만드는 진정한 원동력이라 믿는다. 베끼고 짜집는 논문의 횡행, 구태의연한 교수법, 발제 수준으로 전락한 세미나, 연구보다 로비를 강조하는 풍토 등 오늘날 대학원의 현실은 모두 위기지학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위기지학은 지독한 텍스트 이해와 분열적인 지식강박, 자기 삶의 지반으로서 현실을 성찰하는 것이다.최근 입학전형에 대한 풍문이 허다하다. 그 실체 없는 소문은 입학절차를 유연화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대책 없는 발상에 어이가 없을 뿐더러, 그것이 최근 진행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교육정책의 일환임을 알고 있다. 이에 대학원중심대학은 하나의 선언에 불과했음이 드러난다. 실제로는 대학원교육에 대한 의지가 전혀 없는 것 아닌가. 한편 대학원장은 원내 갈등을 조정하고 연구활동을 지원하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가. 오히려 우리에게 대학원장은 독선적 정책결정자로, 무책임한 개혁주도자로 인식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그에게 연구 주체들의 의사를 반영하고, 그들의 연구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리더십을 요구한다.

우리에게 제도와 행정은 연구를 지원하는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 일종의 강압적인 훈육시스템으로 다가온다. 공부란 무엇보다 위기지학이다. 독서삼매경에 빠지고픈 욕구만큼, 연구자를 억압하고 관리하려 드는 일련의 움직임들에 저항할 필요를 느낀다. 오는 19일로 예정된 전체대표자회의에서 이에 대한 활발한 논의가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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