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지르기’라는 말이 시대적 과제인양 회자되곤 한다. 이에 최근에는 ‘세로지르기’라는 말까지 흘러나온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을 가로지르려 했는가. ‘가로지르기’의 주장자들은 한결같이 경계를 넘겠다고 한다. 여기서 경계는 구획된 분과학을 가리키기도 하며, 보다 넓게는 모든 대상의 범주들을 지시하기도 한다. 먼저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진 경계의 구분선을 문제삼을 테다. 그 기준은 과연 명확하고 보편 타당한 것인가. 또 그 경계를 구획 또는 수호하는 진리의지는 무엇인가. 이렇게 묻는다. 그리고 이질적인 것들을 소통시키는 일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질적인 것의 소통은 생성이라는 이름으로, 차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21세기의 사회적·학문적 과제를 ‘타자와의 공존’이라 요약할 수 있다면, 이러한 논의들은 한편으로 그 철학적 기초를 마련하는 것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모색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논의는 철학자의 이정우의 다음과 같은 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로지르기는 이것저것 많이 하는 것도 아니요, 여기저기 방황하는 것도 아니요,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로지르기의 정신은 우리에게 주어진 격자가 특정한 시대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 그 격자가 필연적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출발하며, 그런 격자에 저항하는 데서 출발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특히 학문후속세대에게는 시대가 요청하는 과제가 아닐 수 없다.그러나 과연 경계의 실체는 명료한가. 격자화된 장소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가.
모호한 대상으로 경계를 사고한다면, 넘나들기의 전략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분과학의 가파른 경계 앞에서 허우적대는 모습을 탈주라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학제간 연구(Interdisciplinary Studies)가 대표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철학자 김용석은 이렇게 진단한다. “그 실질적 효과는 매우 미미하다는 것이다. … 그런 까닭은 학제적 가로지르기에 대한 의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늘날 그것을 적극 주장하는 것 자체가 그것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분과학문의 높은 성벽을 허물었는데, 막상 보니까 성 안에 별 것 없다는 사실이다. 가로지르기의 과정에서 만나는 것이 ‘별 볼 일 없다’면, 그런 가로지르기는 의미없고 재미없게 된다.”학부제는 그런 어설픈 가로지르기의 대표적 예일 것이다.
대학원도 예외는 아니다. 각종 협동과정이나 특수한 제도를 그럴 듯하게 만들어놓았을 뿐, 실제 그것이 목표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 애매하다. 운영의 측면에서만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연구자들 스스로도 깊이를 갖지 못한 넓이에 집착하고 있다. 알맹이 없는 수사만 요란하다. 24대 총학생회장은 학술적 패러다임을 변환시키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우리 연구자들의 깊이는 어디쯤인지, 넘나들 수 있는 경계는 무엇인지, 어떻게 그것을 지원할 것인지 고민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혹 너무 안일하게 지식의 문제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따라서 이를 전문적으로, 그리고 중장기적으로 고민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대학원신문도 같은 오류를 반복한 느낌이다. 최초 주관성의 칼날을 높이 들겠다 선언하긴 했지만, 막상 그것을 어떻게 펼쳐 보일지 헤맨 시간이 상당했다. 6면에서 새롭게 만든 ‘논쟁따라잡기’가 대표적인데, 소재의 빈곤보다는 편집자가 어떻게 개입해 들어갈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또 우리 연구자들의 모습을 포착해내지 못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러니 너무나 당연하게도 어떤 전망도 제시할 수 없었다.
대학원신문에게 원우는, 또는 원우에게 대학원신문은 서로 모호한 대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깊이도 넓이도 갖지 못한 채 어정쩡한 모습으로 보였으리라. 환상을 기획으로 택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지만, 치밀한 논증에 앞서 주장만 앞서는 작금의 현실, 즉 담론의 환상도 있다. 다른 누구의 일이 아니다. 최초 선언이 한낱 환상으로 전락했음을 자인한다. 그것은 우리 독자들의 모습 대강도 파악하지 못한 데 기인할 것이다. 독자와 함께 만드는 신문. 이게 차후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