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호 [刮 目] 디지털 유령의 기습공격
2005-03-13 16:36 | VIEW : 38
 
刮  目 디지털 유령의 기습공격


 

류신 / 한독문화연구소 연구원



최근 연예인 x파일이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면서 디지털 매체를 통한 개인의 사생활 침해라는 민감한 사안이 또다시 불거졌다. 디지털 문명이 낳은 이러한 신종 인권침해는 비단 연예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이다. 읽기보다는 지우기가 더 바쁜 스팸메일과 시도 때도 없이 걸려와 청각을 교란시키는 스팸전화는 우리네 일상의 리듬과 맥을 끊어 놓는 주범이다. 개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출몰해 우리를 호리는 ‘디지털 유령’의 기습공격, 이 낯선 손님의 내정간섭은 그래도 애교로 봐 줄만 하다. 하지만 디지털망(網)의 틈으로 개인의 정보가 새어나가고 있는 점은 불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심각한 문제는 개인의 사생활을 감시하는 소프트웨어들이 널리 보급되고 있다는 점이다. 특정 사이트의 접근을 막는 차단용 프로그램은 물론 채팅의 내용을 엿듣거나,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개인의 모든 행적을 은밀하게 추적해 기록하는 감시용 프로그램이 차츰 일반화되고 있다. 최근 미국 연방수사국의 위력적인 인터넷 도청시스템 카니보어(Carnivore)는 사생활을 통제하는 디지털 시대의 ‘빅브라더’로 떠올라 논란을 일으켰다. 카니보어는 거대한 데이터 속에서 의심이 가는 고깃덩어리를 순식간에 찾아낸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이렇게 보면 사이버 세상에서 ‘나’라는 인격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나’는 어떤 꼬챙이에 찍힌 한갓 고깃덩어리, 노출된 표적일 뿐이다. 이제 온라인은 더 이상 자유로운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독일의 시인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는 디지털 문명이 기존의 사회구조를 뿌리째 뒤흔들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경제수준과 문화적 교양정도가 아니라 정보계급이라는 새로운 코드가 도래할 디지털 사회를 재편하는 잣대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가 동물 알레고리를 통해 그린 디지털 제국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를 차지하고 있는 녀석들은 ‘카멜레온 군단’이다.


변화하는 외부환경에 약삭빠르게 보호색을 바꿔가며, 특정한 노하우를 통해 정보를 관리·통제·독점하는 이른바 신흥 디지털 부르주아가 기존의 정치적 기득권층을 제치고 최고 권좌에 앉을 수 있다는 예언이다. 다소 과장된 시나리오로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디지털에 대한 그의 반성적 성찰은 경청에 값한다. 우리는 지금 너무 쉽게 디지털이 주는 편리함과 사생활을 바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모든 압축하고 복제하고 합성하며 장관을 연출하는 디지털 문명의 장밋빛 미래에 내남없이 유괴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에게 디지털은 ‘선물(膳物)’이 아니라 ‘선물(先物)’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그 대가가 디지털 제국 체제로의 예속이라면 너무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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