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호 [특집-쾌락] 쾌락, 철학의 옷을 입고

욕망과  쾌락의 사슬을 끊어라

김재인 / 서울대 철학과 박사수료, 문예아카데미 강사

현대 사상은 욕망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극단적인 대립을 보이고 있다. 한편에 정신분석의 입장이 있다면 다른 한편에는 들뢰즈와 가타리 등 분열분석의 입장이 있다. 이들 입장의 대립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주제가 보편적인 삶의 태도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후자의 입장에서 욕망에 관한 이론을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욕망에 관한 정신분석의 입장은 다음 셋으로 요약된다. 결핍이라는 부정적 법칙, 쾌락이라는 외적 규칙, 환상이라는 초월적 이상. 먼저 욕망이 결핍인 까닭은 욕망하는 것을 어찌 결핍하고 있지 않았을 수 있겠느냐는 추론에서 나온다. 또한 쾌락은 욕망의 목표로, 쾌락을 얻으면 욕망은 일시적으로 입을 다물고 짐을 덜게 된다. 끝으로 욕망은 기쁨의 향유를 원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한데, 그 까닭은 그러한 바람은 이상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을 마조히즘에 적용시켜 보면 우스꽝스런 결론이 도출된다.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보기에, 마조히스트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쾌락을 추구하며, 오직 고통과 환상적인 굴욕에 의해서만 거기에 도달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고통과 굴욕이 깊은 불안을 완화시키거나 몰아내는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이것은 정확한 이야기가 아니다. 마조히스트의 고통은 그가 치러야만 하는 대가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쾌락에 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욕망이 쾌락이라는 외적 척도와 맺고 있는 사이비 관계를 부인하기 위해 치러야만 하는 대가인 것이다. 욕망은 쾌락과는 아무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쾌락과의 연관성을 끊어내야만 한다. 쾌락은 결코 고통을 우회해서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쾌락은 긍정적 욕망의 연속적인 과정을 중단시키기 때문에 최대한 지연되어야 한다.
욕망이 바라는 것이 쾌락이 아니라면 욕망은 도대체 무엇을 바라는가? 경험적으로 볼 때 욕망은 쾌락을, 더 많은 쾌락을, 자꾸만 더 많은 쾌락을 바라지 않는가? 그러다가 좌절하여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기도 하지 않는가? 이것이 욕망의 역리요, 이 때문에 또 어떤 사람들은 욕망의 축소나 욕망의 배격으로 향하기도 한다. 모든 욕망을 최대한 줄여가자는 금욕주의 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현대성은 바로 이러한 전통적인 욕망관을 폐기하고 전혀 다른 욕망 이론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마조히즘에서 본질적인 것은 힘의 문제이다. 다시 말해 본능적인 타고난 힘들을 파괴하고 이를 전달된 인공적 힘들로 대체하는 것이 문제이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파괴가 아니라 유통이며 길들이기이다. 그리하여 바람직한 어떤 지속 상태, 강렬함의 상태에 이르러야 한다. 고통을 수단으로 이용해야 하는 마조히즘이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훨씬 더 나은 수단과 절차가 있을 수도 있다. 단지 마조히스트에게는 이 방법이 적합했을 뿐이다.
욕망은 어디까지나 생산 과정으로 정의된다. 따라서 그것은 욕망에 구멍을 내는 결핍이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쾌락 등 어떠한 외적 계기와도 무관하다. 그것은 내재적인 흐름이며 내재성의 흐름이다. 욕망이 쾌락을 규범으로 삼지 않는 까닭은 충족될 수 없는 결핍 때문이 아니라 이와 반대로 욕망의 긍정성 때문이다. 욕망은 끊이지 않는 자기 생산이다.
그레고리 베이트슨은 다음과 같은 아주 특별한 것을 가리키기 위해 고원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자기 자신 위에서 진동하고, 정점이나 외부 목적을 향하지 않으면서 자기 자신을 전개하는, 강렬함들이 연속되는 지역. 발리 섬의 문화를 보면, 이 섬에서는 아이와 어머니 사이의 성적 놀이나 사람들 사이의 다툼은 이런 기묘하고도 강렬한 안정을 유지하면서 진행된다. 강렬함이 연속되는 일종의 고원이 오르가슴을 대체한다.
또 그것은 전쟁이나 정점을 대체한다. 표현과 행위를 그것이 지닌 가치 자체에 따라 내재적인 판에서 평가하는 대신에 외부의 목적이나 초월적 목적에 관련시키는 것은 서양 정신의 유감스런 특질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최고 걸작 <천 개의 고원>은 바로 이렇게 정의된 욕망 이론서이다. 저자들은 끝장을 보고서야 끝낼 줄 알게 되는 쾌락지상주의에 반대한다. 그것은 욕망의 잘못된 사용이다. 욕망은 자신의 충만한 생산, 강렬한 생산만을 원한다. 저자들이 도가(道家)를 언급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도가에서는 음과 양, 즉 여성적 에너지와 남성적 에너지가 강렬함의 회로를 형성하며, 이 과정에서 역량이 증대된다. 어떻게 해야 이런 상태에 이를 수 있는가, 저자들은 단지 여기에만 관심이 있다.
마약을 하지 않고서도 마약을 한 것과 같은 상태에 이르는 법을 연구하기, 단지 맹물을 마시고서도 취한 상태에 이르는 법을 연구하기 등, 욕망 이론은 이런 것들에만 관심이 있다. 나머지는 잘못된 시도일 뿐이다. 한번 올라갔다가 추락하는 허탈한 쾌락보다도 더 심오한 것이 있으니, 강렬함의 지속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상태에서는 항상 다시 시작하고 접속할 수가 있어서 삶은, 욕망은 항상 자신을 긍정하며 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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