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호 [특집-환상, 그 퇴행과 전복 사이] 환상 3, 학벌

권희철 편집위원

한양대에 다니는 친구 하나는 만날 때마다 대학입학부터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둥 패자부활전이 없는 사회라는 둥 한탄을 늘어놓는다. 그런데 “지하철역에 내릴 때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 나보다 못한 자가 많으니까. 그들이 나를 부러워하리라 착각하는 거야.” 솔직한 고백이다. 물론 2호선이 반바퀴를 더 돌면 어깨가 다시 쳐지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학벌이 세상을 좌우한다는 주장이 많다. 구조화된 문제라고도 한다. 그 폐해를 감안한다면, 학벌폐지운동은 나름대로 의미있는 일이리라. 그러나 학벌이 과연 근절될 수 있는 대상인지 의심스럽다. 요컨대, 학벌은 사람들이 이름에 대해 갖는 환상 중 하나다. 한국사회는 유독 이름에 집착한다. 아마도 正名論은 그 이론적 토대가 되겠다.

글을 쓸 때 실명과 가명에 따라 운신의 폭을 달리 한다. 그것도 지면의 이름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직함도 중요하다. 세르반테스와 메나르의 동일한 글 ‘돈 끼호테’를 구별하기는 어렵지만, 베낀 자는 메나르가 되기 십상이다. 똑같은 문장을 교수가 말하면 훌륭하고 학생이 말하면 신뢰하기 어렵다. 이처럼 이름에 대한 환상은 부인할 수 없는 우리의 욕망이고, 그것은 근절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이름에 대한 반대에도 이름을 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조선일보가 있고 안티조선이 있다. 김갑숙에는 김서갑숙이 도사리고 있다. 어찌 보면 모든 행위는 이름 주위를 배회하며 그 욕망을 반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름을 벗어나기란 이토록 어렵고 복잡하다.물론 학벌은 이름을 넘어서 실체다. 우리는 그것이 물질적인 것임을 잘 안다. 서울대라는 문제의 근원지가 있고, 그것은 사회적 위계와 유비꼴을 형성한다. 그러나 이로는 불충분하다. 친구는 순환하는 2호선에서 양가적인 감정에 사로잡힌다. 때로는 우월감으로, 때로는 열등감으로. 도서관 화장실 낙서들은 이 양가 감정들의 난장에 가깝다.

  중앙대의 순위를 매기고 자신의 위치를 타진한다. 우리는 여기서 자유로운지. 책 한 권도 제 힘으로 못 읽으면서 학벌이 문제란다. 박사라는 이름이 그 사람의 실력인 줄 알고 석사를 무시한다. 위로 갈수록 강도는 더 심해진다.사회적으로 학벌문제를 제기하는 것과 이를 근원부터 문제삼는 것은 다르다. 학벌 욕망은 우리의 의식·무의식에서 꿈틀댄다. 사라지지 않고 증식하거나 둔갑해버리는 환상. 따라서 단지 다른 환상들로 바꿔칠 수 있을 뿐이다. 학벌 환상은 집단에 대한 환상이기도 하다. 자기 과에서, 지도교수에서, 학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것들이 곧장 나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물론 환상의 끝은 또 다른 환상으로 이어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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