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호 [특집-공동글쓰기] 공포는 영혼을 잠식하는가

나의 99%는 늘 제거된다. 그러나 나는 늘 여기 이 자리에 있다.나는 빛이 자살한 어둠 속에, 더 갈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그리고 의식의 뒷덜미에, 나는 1%로 남아있다. 그들이 1%로 남은 나에 의해 잠식당할 때 나는 비로소 99%로 부활한다. 반쯤 눈 떠 있는 지금의 나는 혼수 상태. 그들 영혼의 동요는 매력적이다. 생명을 파먹고 심장을 갉는 형체가 없는 나는 너희가 흘리는 피로 자라며 강대해진다.

하나. 묘혈처럼 곳곳에 커다란 웅덩이를 파놓았으니

시커먼 안개에 쌓여있다. 몸이 으실으실 춥다. 나는 지금 무엇을 입고 있는가. 그래 나는 코트를 입고 있구나. 그런데, 왜 이렇게 추운 거지? 칼 바람이 뼈 마디를 휩쓴다. 이미 어두워진 하늘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내 눈 앞에 시커먼 안개만 있다. 나는 걸음을 빨리 한다. 종종걸음으로 이 안개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있다. 나는 안개에서 벗어나려 하는가. 그래. 나는 안개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나는 어디를 가고 있는 중이었는가. 집! 집으로 가는 중이다. 아무도 없는 길에 서있다. 집에 가려면 이 길을 지나가야 한다. 이 길이 이렇게 길었던가. 순간, 불길하다. 차갑고 축축한 무엇인가 내 몸을 훑고 지나간다. 걸음을 더 빨리 하자. 누군가, 누군가 걸어온다. 누굴까. 인적 없는 길에서 마주치게 될 그 사람. 과연 누굴까. 누구야? 남자! 늙은 남자, 술 취한 늙은 남자다. 여기가 어디지? 어디로 가야되지? 검붉은 땅이 아가리를 벌린다. 일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기우뚱, 땅은 비스듬이 갈라지고 달은 찢어진다. 그 날! 그 날! 뭉개져버린 내 얼굴. 놈의 발에 짓밟혔던 배가 뒤틀린다. 피가 멈추지 않아. 지금 내 몸 구석구석에서 다시 흐른다. 코 속에서, 입에서 그리고 내 질에서… 절망적이다. 도망쳐야 한다. 어디로? 땅은 자꾸만 내게로 쏟아진다. 내 머리카락 하나 하나가 살아있는 듯 곤두서고 있다. 심장이 조여온다. 놈의 기분 나쁜 숨소리, 땀 냄새와 술 냄새, 그리고 그날의 내 비명만이 내 귓속을 때리고 있다. 비틀거리는 저 놈이 날 쳐다보고 있는 것 같다. 아악! 그날이랑 똑같아.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 저 놈에게 허둥대는 내 모습을 보이면 안돼. 뒤로 돌아 뛸까. 아니다. 저 놈에게 빈틈을 보이면 안돼. 안돼지. 어떻게 하지. 어떻게. 그 놈이 점점 더 가까이 오고 있다. 최대한 벽으로 붙어. 저 놈이 너란 존재를 잊어버리도록, 최대한. 아악! 저 놈은 날 향해 오는 거야. 내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저 놈도 움직이잖아. 안 되겠다. 뒤돌아 도망가자. 그래 뒤돌아서 도망가는거야. 아직 포기하면 안돼! 뒤돌라구! 뒤를 돌아! 아악! 뒤돌라구! 뒤돌아. 내 손이 무언가에 잡혔다. 그 놈이다. 술취한 놈의 눈은 파란빛으로 빛나고 있다. 손목을 틀고 놈을 밀어내자. 도망가자. 빨리. 마지막 기회다. 지금 도망가야만 해. 으아악! 칼! 놈의 손에 있는 건 칼이다. 칼! 으악! 쇼윈도에 이상한 광채를 내는 놈의 눈이 비친다. 살기어린 놈의 칼이 나를 향해 오고 있다.

눈이 뻘겋다. 며칠동안 자본 일이 없다. 거울에 그놈이 있다. 저건 내가 아니지. 핏빛이 흔들린다. 차마 떨어지지 않은 눈물이 눈 속에서만 그렁거린다. 째깍 째깍. 시계는 밤낮 없이 소리를 낸다. 저놈의 소리에 죽을 지경이다. 요즘엔 천둥 마냥 큰 소리다. 이 방 어딘가에 그놈이 있다. 분명 그놈이 맞아. 직장을 뺏고. 사랑마저 빼앗고. 이젠 질식시키려 하는. 어디지. 어디에 있는 거지. 며칠동안 나가보지 못했다. 오전일까 오후일까. 칠흑 같은 방이다. 이 방안에서 시간은 정지된 지 오래다. 창에 비친 그놈의 눈빛을 보았다. 그놈도 그놈 눈빛도 온통 핏빛. 그놈이 분명했다. 그놈의 눈이 떨어지지 않는 창. 허름한 판자로 막아놓았다. 나의 은밀함을 탐닉하려는 그 놈의 간교한 시선을 제거해야 한다. 째깍 째깍. 제길. 저놈의 시계. 시간도 없는 방에 제 혼자 미친 듯이 돈다. 전화벨 소리. 누구지. 전화를 받아야 하나. 내가 전화를 받는 순간 그 놈도 귀를 열 것이 분명하다. 수화기 사이로 그놈의 음흉한 소리가 새어 나오겠지. 듣기만 해도 심장이 멈출 듯한. 그래, 그놈은 그러고도 남을 놈이지. 하지만 왜지. 왜 그러는 거지. 왜 하필이면 나야. 더 이상 뭘 알고 싶은 걸까. 개자식. 나한테 뭐가 남았다고. 더 이상 무엇을 캐고 싶은 거야! 죽은 듯한, 희미한 생기마저 뺏으려는 건가. 나는 없어지고 있다. 둔탁한 소리, 툭.툭. 방문에 그 놈의 뻘건 눈빛이 날 감시하고 있다. 이제 여기까지 날 찾아왔구나. 춥다. 얼어죽을 지경이다. 바닥에 흥건한 땀마저 얼어붙었다. 온도를 올려야 하는데. 내가 움직이면 그놈의 촉각은 활짝 열릴 것이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온몸이 묶인 듯. 온몸이 얼어 버린 듯. 이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전화. 문. 티브이는? 컴퓨터는? 어느 하나 마음놓을 수 없다. 분명 거기엔 그놈의 시뻘건 눈이 도사리고 있다. 뭘 해도 그놈은 알아 버린다. 전류에는 그놈의 시선이 흐르고 있다. 걸리면 즉사하는 독성 바이러스로 나의 사생활을 옭아맨다. 벌겋게 상기된 눈 빛. 칠흑 같은 방에 유일한 빛. 어둠마저 반사하는 저 빛. 흐물거리는 핏빛. 식어버린 커피가 담긴 잔을 손에 거머쥐고, 거울을 향해 던져버린다. 나를 보지마.    

몇 분이지? 벽에 걸린 시계는 다섯 시 삼십 사 분을 가리키고 있다. 그를 만나기로 한 시간은 여섯 시. 시간이 다 되어간다. 그는 약속시간에 늘 조금씩 늦게 나타나는 나를 못 견뎌 한다. 서둘러야 한다. 그러나 나는 지금 전화기 주변에 깨어진 거울 조각들을 모으고 있다. 거울 조각에 비춰진 깨어진 나의 얼굴들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재수가 없다. 그는 내게 말하곤 한다. 너는 왜 눈썹을 그렇게 그리니, 좀 세련 되 보이게 그릴 수 없니, 머리 모양을 바꿔보는 게 어때, 립스틱이 진하구나. 오늘은 어떤 말을 내게 할까. 화장이 뜨지는 않았는지, 마스카라가 번지지는 않았는지, 아, 그가 오늘은 무슨 말을 할까. 몇 분이지? 아, 네 시 이십 칠 분. 아직은 여유가 있다. 자, 어디서부터 다시 손을 대볼까. 머리를 다시 만져볼까, 아니야, 마스카라를 다시 칠해보자. 눈을 지긋이 뜨고 거울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어 본다. 눈꺼풀을 뒤집고 마스카라로 눈썹을 한올 한올 위로 걷어올린다. 눈이 뒤집어 질듯이. 영 맘에 안 든다. 그는 틀림없이 오늘은 뭉친 마스카라에 대해서 말을 할 것이다. 그는 언제나 많은 것을 약속한다. 나는 결코 변하지 않을 거야. 너도 변하지 말아, 라며. 나는 대답한다. 변하지 않아. 그러나 생각한다. 너는 곧 변할 거야.  오늘은 그가 내게 무엇을 약속할까. 그리고 내게서 어떤 확답을 받으려 할까. 그는 오늘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을 하며 나 역시 그런지 물어볼까? 그러면 나는 뭐라고 대답을 할까. 늘 그랬듯이 입으로는 ‘네’ 라고 말을 하면서 마음속으로는 ‘아니오’를 생각하겠지. ‘네’라고 대답을 하는 나를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할까. 눈가가 파르르 떨려온다. 떨리는 눈가를 진정시키려 눈으로 손을 가져가는 순간, 손에서 거울이 미끄러져 내린다. 재수가 없다. 거울이 깨지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깨지고, 사랑하던 연인이 떠나간다고 그랬다. 몇 분이지? 전화벨이 울린다. 그다. 그는 이미 약속 장소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그는 늘 정확하다. 나는 생각한다. 내가 지나치게 예민했어, 그는 내가 보고 싶어서 벌써부터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잖아. 전화기를 내려놓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주변의 먼지를 손으로 쓸어모아 본다. 아… 손바닥에 피가 고인다. 깨어진 거울 조각이 손바닥에서 날카롭게 반짝인다. 몇 분이지? 시계 바늘은 이미 여섯 시에 닿아 있었다. 그는 나를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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