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호 [특집-기억4/죽음] 기억되지 않는 것들을 위하여

남청수 / 편집위원

사람이 동물과 정말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 이런 말은 하도 많이 해서 정말 인간이 동물과 다르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 순간 중의 하나는 죽을 때, 가 아니라 죽는 것을 기억하려 할 때일지도 모르겠다. 개나 고양이나 하루살이나 거북이도 모두 죽음을 맞이하지만, 이들이 인간처럼 죽음에 대해 별다른 느낌을 갖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그들이 죽음을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적어도 경험상으로는) 분명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기억하려한다는 측면에서 가장 전형적인 행사는 장례와 제사, 그리고 임종을 지켜주는 관습 등이다. 장례나 제사의 경우는 종교나 지역에 따라서 불에 태우거나 땅에 묻거나 아니면 물에 띄우거나 동물의 먹이가 되도록 들에 버려두기도 하는 등 다양하지만 최소한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경우 죽음에 대해서 특별한 태도를 갖는 것은 분명하다.
사람은 왜 죽음을 기억하려할까. 모든 것을 초탈한 성인의 수준에 이르지 않고서야 죽음은 모두들 두려워하는 것임에 분명한데, 왜 사람들은 때가 되면 죽은 자를 기리고 죽음이라는 것을 애써 들춰내려 하는 것일까.

나는 군복무 시절에 근무지에서 발생한 총기사고로 바로 곁에서 시체를 본 적이 있다. 그것이 나에게는 지금까지 유일하게 죽음이라는 것을 접하게 된 경험이었는데, 그 당시의 느낌은 잊고싶어도 잊혀지지 않을 만큼 나의 뇌리 속에 각인되어 버렸다. 군대의 거의 모든 경험들을 우스운 추억으로 얘기할 수 있는 지금에도, 이것은 나에게 너무나 생생하게 남아있어 가끔 꿈자리를 어지럽힌다. 이것은 그 기억이 단지 나에게 특수한 것이었기 때문일까.

기억은 아무리 개인적인 것을 담고 있다 하여도, 본질적으로 나와 무엇과의 상호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무엇이 나와 같은 의사소통수단을 활용하는, 아니면 적어도 공유할 수 있는 기호를 갖고 있을 경우 그로 인한 공감은 배가될 것이리라.
한편 배가된 공감이 상실된다면, 물론 충격도 배가될 것. 그렇다면 죽음을 기억할 수 밖에 없는, 아니 잊을 수 없는 것은 그/녀가 나에게 주었던 에네르기를 죽음이 앗아갔기 때문인가. ‘나는 그/녀를 사랑했노라. 그래서 나는 그의 부재를 감당할 수 없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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