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호 [특집-기억1/영화] 기억되지 않는 것들을 위하여

김일란 / 영화학 석사

강탈당한 과거의 기억에 옭매여 있는 사람은 가장 열렬한 영화 감독이 될 지도 모른다. 어떤 충격을 일으켰지만, 종합적 기억의 좌표 위에 적당한 자리를 잡지 않은 사건은 어떤 이미지로만 남기 때문이다. ‘전쟁’을 사막에 자리잡은 일본인 수용소에서 수통에 물을 받던 이미지로만 기억하는 어머니의 경험에 일정한 내러티브를 부여함으로써, 그녀의 삶과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일본인 제 3 세대 여성의 다큐멘터리 에서 잘 드러나듯이 말이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 정체성의 저수지이다.

그러나 벤야민의 설명처럼, 현대의 기억은 응집된 경험 Erfahrung과 내적 삶의 분열된 인상, 이미지 혹은 체험 Erlebnis으로 분리된다. 점차적으로 정체성의 근거로 제시되었던 경험은 더 이상 연속적인 과정이 아니라 불안정한 경험의 입자들, 파편화된 이미지들인 체험으로 축소되고 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경험되지 않았던 것, 주체가 경험으로 겪지 않았던 일도 아주 우연적으로 기억의 구성요소가 될 수 있다. 이때, 기억은 정보와 호환가능해 지기도 한다. 이것은 경험의 공유를 가능케 하는 영화와 같은 테크놀로지로 인해 가속화된다. 따라서 기억은 한 개체의 폐쇄된 육체 속에 갇히지 않고, 외장(外藏)된 정보나 기억으로 탄생한다.

기억과 정보를 구별하고, 경험과 기억과의 관계를 통해 정체성의 보존이 가능할 것일까. 소재적 측면에서, 기억 변형 및 확장 장치와 상실된 기억을 통해, 정체성 문제를 고민하는 영화들을 살펴보자. 저장된 타인의 경험을 체험함으로써, 기억에 기반한 정체성에 질문을 던지는 캐더린 비글로우의 <스트레인지 데이즈>. 두뇌와 컴퓨터의 동형성을 통해 기억술과 정보과잉의 위험성을 고발하는 로버트 롱거의 <코드명 J>. 정보이식으로 인격을 개조하여, 사회부적응자를 처리해버리는 사회를 그린 테리 길리엄의 <여인의 음모>. 지워지지 않은 기억, 종종 기억력이라는 이름으로 찬탄되는 그것이 얼마나 끔찍할 수 있는지는 오토모 가츠히로의 <메모리스>. 답에 관해서는 흡족하지는 않을 지라도, 피해갈 수 없는 기억과 정체성에 대한 사유의 폭이 넓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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