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호 [특집-열린 논쟁과 그 적들] 그 적 세 번째: “침묵하는 다수”

말없는 다수, 실제로도 없다

노혜경 / 시인·『아웃사이더』 편집위원

2000년 들어 우리 사회는 인터넷이라는 전혀 새로운 매체의 도전을 받고 있다. 바로 인터넷 토론문화의 확산이라는 새로운 실험이다. 실제로 인터넷 자체는 지난 몇 년간 꾸준한 확장을 해 왔으나, 금년들어 급격한 신장세를 보인 것은 어떤 네티즌의 농담처럼 O양 비디오 때문이 아니라, 안티조선으로 대표되는 수많은 토론사이트들의 발생 때문이 아니었는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게다가 우리모두앙 -’우리모두’의 취지에 찬성하는 사람을 말함- 들 가운데 상당수가 특별한 통신경력이나 인터넷 경력을 지니지 않은, 바로 나와 같은 초보 네티즌이라는 것을 알 때의 경이로움은 정말 막대하다.

토론의 열린 장, 인터넷
그렇다면 무엇이 이 사람들을 인터넷이라는 광야로 이끌고 나왔을까. “성역과 금기 없는 비판”이라는 강준만 교수의 구호로 요약될 수 있는 비판문화가 그 핵심이 아니었을까.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비리와 병폐는 인터넷 상의 어느 게시판을 거점으로 하여 사정없이 비판되고 폭로되기도 한다. 모든 사안은 그 사안에 관심을 가진 특별한 사람들에 의해 논쟁의 도마 위에 오르고, 그러면서 해법의 물꼬가 트이는 것을 지난 일년 내내 목도하고 있다.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을 지니고 있어도 어디 가서 말할 데가 없던 사람들이 인터넷 상에 흩어져 있는 별들 같은 수많은 토론 사이트들에서 이야기하고, 퍼다 나르고, 조율하고, 행동한다. 기존의 문자매체 논객들과는 정말 유가 다른 이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노라면, 우리가 그동안 물적 근대화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수행해 본 적 없는 성숙하기 연습 궞瓦돌?교수의 용어로 말하면 심층근대화?이 이분들로 인해 대단히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치에 맞게 사고하고, 타자의 말을 알아들으며, 언어를 통해 설득하거나 설득당하고, 깨달은 것을 실천한다. 바로 이것이 ‘안티조선 우리모두’가 가장 전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새로운 시민들의 모습이 아닐까.

그런데, 이렇게 성숙한 자세를 보여주는가 하면, 논쟁의 자장이 전국민적인 범위를 지니고 있는 사안일수록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이 눈에 뜨인다. 특히 지역차별에 관계되는 주제라든가, 조선일보 문제, 여성 차별적 요소가 있는 사안들 등의 논쟁에 참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말은 주고받는 것이라는 초보적인 이치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나는 이것이 사안 자체가 지닌 문제라기보다 논쟁 참여자의 범위가 넓어진 데 따른 문제라고 생각한다. 지역, 여성, 언론, 정치들은 실제로 전국민적 관심사이다. 이 문제에 대해 특별히 논리적 사고 훈련을 하지 못했다해도 나름의 견해는 누구나 지니고 있으며, 거기에 대해 말하고 싶어한다. 일단 말하기 시작하면, 타자의 말에 귀기울이려는 아주 기본적 자세만 갖춘다면 성숙의 방향으로 나아가기는 시간문제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논쟁의 주제에 대해 실제로는 무지한 사람들이 참여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역, 여성, 정치, 언론이라는 네 가지 화두를 논의하는 데는 심각한 복병이 도사리고 있다. 관심의 자장은 전국민적이지만 논쟁의 현장에는 개인들만이 있다는 점에서, 반드시 어느 한 쪽은 소위 ‘여론’ 또는 ‘침묵하는 다수’를 들먹이며 논쟁 그 자체를 가로막으려는 시도를 하기가 일쑤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논쟁에서 이기려고.

나는 다수를 들먹이는 사람들의 내면에는 기득권을 옹호하려는 심각한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전통적으로 다수는 언제나 이기는 사람들의 편이었고, 다수를 들먹일 수 있다는 것은 지금 이겨 있는 사람들의 편이라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바로 그 다수의 권위가 말의 논리에 의해 흔들리고 설파당하려 할 때 토론 자체를 무화시키려는 수법으로 잘 사용한 것이 바로 ‘침묵하는 다수’를 동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침묵하는 다수는 ‘여론’이고 나아가 ‘민심’이며 ‘천심’이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심리를 일정 수준까지는 이해한다. 한국사회가 소수자들의 권리를 가장 초보적 민주주의라 할 다수결에 의해 억압해온 사회였기 때문에, 다수에 속한다는 것은 생존과 직결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예/아니오의 결론만 주고 과정은 생략한 상태에서 줄서기만을 허용해 온 오랜 정치적 억압이 내면화된 결과, 토론 그 자체를 통해 결론을 도출하고 거기에 따른다는 것이 대단히 무섭고 생경한 일이 되고 마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소위 ‘여론’의 향배, ‘민심의 향배’에 따르는 것이 안전하다고 느낀다. 이긴 쪽에 줄을 서야 살아남는다는 건 경험치이고, 소수의 의견을 말해도 된다는 것은 아직 경험되지 않은 대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다수는 기득권의 편인가. 가벼운 숫자놀음으로 따져보자. 지난 4.13 총선이 끝난 직후, 영남에서 한나라당이 싹쓸이한 것을 두고 영남의 민심이니 하며 한나라당 진영에서 목소리를 높인 일이 있다. 그러나 산술적인 계산으로만 이야기해보면,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당시 영남지역의 투표율은 60% 남짓밖에 되지 않았고, 그나마 대부분의 의원들이 절대적 우위가 아닌 상대적 우위로 당선되었다. 후보자가 많았던 곳은 30% 정도의 득표율로도 당선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를 전체 유권자수와 비교해 보면, 20% 이하의 지지밖에 얻지 못하는 국회의원이 더 많다는 결론이 나온다.

침묵하는 다수는 없다
실제로 이 정도의 지지라면, 국회의원이 다수를 대변한다는 말은 완벽한 거짓말이다. 국회의원은 이긴 소수자들의 대변인일 뿐이다. 다만 그들이 이겼기 때문에 판돈을 싹쓸이해간 것에 불과하다. 한 번 싹쓸이를 했다고 언제까지나 판돈을 혼자 먹을 수는 없는 법이지만, ‘민심이 그렇다는데’라는 마법의 말이 사고가 미분화된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 일단 그것이 거대 언론의 입에서 ‘민심’의 칭호를 얻고 사회 기득권층이 그것을 인정하면 말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딸려 가는 판돈이 된다.

그렇다면 ‘침묵하는 다수’를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가. 선거가 투표하지 않는 사람들의 선택권을 보장해주지 않듯이, 발언하지 않는 사람들의 발언권을 보장해 줄 이유가 없다는 것을 논쟁의 당사자가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오히려 기득권층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조선일보가 이백만 독자를 가진 신문이라고 말하면서도 조선일보를 보지 않으면서 다른 신문을 보는 독자의 총합은 그 몇 배가 된다는 것을 실제로 무시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이긴 소수가 싹쓸이하려는 전략,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의 기득권층이 다수를 등에 업고 해 온 일에 지나지 않는다. 여론이란 결국 담론 전쟁에서 이긴 사람들의 것이다. 그것을 지금까지 수의 조작에 의해 만들어온 것이 우리 언론과 정치의 불행이었다면, 새로운 토론문화가 발달하고 있는 인터넷은 그러한 침묵하던 다수가 실제로는 말하는 소수들의 총합이라는 것을 점점 더 깨달아 가는 장소라고 하겠다.
결론적으로, 침묵하는 다수는 없다. 말하지 않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논객들은 침묵하는 다수를 등에 업고 싶은 사람에게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그 다수가 네편이란 걸 먼저 증명해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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