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호 [특집 : 열린 논쟁과 그 적들] 그 적 첫 번째: “… …”

침묵의 성에서 나와 대화하라

김현수/편집위원

‘침묵’만큼 자신을 보호해줄 방어벽이 또 있을까. 자신의 의견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은 거꾸로 자신의 색채를 위장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물론 일방적인 지껄임 역시 대화라 부를 수 없지만 침묵 또한 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기도 하다. 특히 의도적인 침묵이라면 더더욱 대화의 조건을 깨트린다. 비판이 대답 없는 독백으로 그치거나, 비판받은 이들이 침묵으로 일관하는 행위는 ‘대화의 부재’라는 현실을 절감하게 한다.

침묵은 언제나 자의적이거나 타의적이다. 즉 침묵을 스스로 원하거나 강요당하기도 한다. 권력관계에 묶인 인간들 대다수는 침묵을 강요받는다. 소수의 권력자만이 침묵을 강요할 수 있고 침묵을 즐긴다. 이렇듯 침묵이 갖는 함의를 고려할 때, 권력관계를 떠나서 침묵을 긍정하거나 수평적 대화를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이다. 그렇다면 누가 침묵을 강요하며 이에 부역하는 자는 누구인가.
군림하는 자에게 대화는 불필요할지 모른다. 자기의 눈높이라는 게 존재할 리 없기 때문이다. ‘할 말은 한다’는 조선일보와 ‘격조 높은’ 이문열이 대표적이다. 결정적일 때마다 조선일보와 이문열은 ‘침묵’을 지킨다. 그들은 자기 말만 하려들지 남의 말을 좀체 들으려 하지 않는다. 비판을 가하되 되돌아오는 반응에는 무관심하다. 아니 무관심 하려 무척 애를 쓴다. 조선일보의 경우엔 안티조선에 관한 ‘유시민의 100분 토론’에서처럼 자신의 입을 대신할 대타를 이용하기도 한다. 또한 지난 1년 동안 안티조선에 대한 기사가 조선일보를 지지하는 독자의견으로 단 두건에 불과하다는 것은 예의 의도적인 무관심, 즉 의도적인 침묵을 입증한다.

이문열은 지난 97년 『선택』으로 인해 천박한(?) 페미니스트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고 중앙일보 2월 8일 자에서는 총선시민연대를 현 정권의 ‘홍위병’으로 몰아 놓었다. 그러나 이문열은 ‘홍위병’에 대한 어떠한 근거를 내놓지도 해명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은 없는 상태로, ‘아니면 말고’라는 식으로 은근슬쩍 넘어간다. 현재까지 어떤 항의에도 한마디 대답하지 않았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침묵인가
「한겨레 21」과의 인터뷰에서 이문열은 안티조선을 ‘문화적 위장’을 통한 보복이라 주장하기에 이른다. 그는 “조선일보가 안티조선쪽에 크게 공격당해 기우뚱한 지경이기 때문”에 조선일보를 옹호하는 것을 그의 “균형감각”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극우적인 발언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극좌적 발언’도 허용해야 되는 것은 아닌가. 조선일보 문제 역시 “독자의 선택에 맡겨야 할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고 ‘독자’로 모든 문제를 환언하는 행위는 결국 의도적으로 자신의 꼬리를 감추는 결과를 낳는다.
또한 동인문학상과 관련해 이문열은 김정란 교수의 비판에 대해 “논쟁을 하려면 격이 맞아야 한다”며 반론을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본질을 왜곡할 수 있다”는 그의 모호한 입장은 한창 달아올랐던 논쟁을 물거품처럼 순식간에 잦아들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조선일보와 이문열의 의도적인 침묵은 음모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더 강한 효과를 미친다.

권력과 야합한 침묵과 알아서 기는 침묵사이에는 강한 연쇄작용이 일어난다. 문학권력 논쟁을 불러일으킨 동인문학상 수상의 경우에는, 후보 선정 자체를 거부한 황석영과 달리 이문구는 동인문학상 수상에 대한 일부의 비판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오히려 그는 지난 10월 9일자 조선일보의 인터뷰에서 “조선일보가 가진 문학 지면을 문인들이 십분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알아서 기는 문인과 지식인들의 ‘침묵의 카르텔’은 심각한 지경이다. 왜 그들은 이토록 조선일보의 문화상업주의에 부역하는 것일까. 대다수 문인을 비롯한 지식인들은 그들이 획득한 상징자본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선일보의 상징폭력 또한 눈감아 주거나 침묵을 지키고 있다.

순수한 ‘왕따’가 될 것인가
대화를 하려면 ‘나’라는 주체의 색깔을 드러내야만 한다. 내가 없는 대화는 무의미하다.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대다수의 사람은 자신의 존재를 비켜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색깔을 드러낸다는 것은 단순한 모험 이상의 위험을 의미한다. 반쪽자리 섬나라에 불과한 남한이 갖는 일편향은 반편향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색깔이 조금이라도 불그스레하다면 곧바로 색깔론에 휘말려 악의적 사상검증에 들어간다. 강준만 교수에 따르면, 비판을 받는 권력은 반론을 펴는 대신 상대를 ‘마녀사냥꾼’으로 몰거나 상대할 가치가 없다며 거부하는 식으로 회피한다.
침묵을 일관하는 이들 중에는 ‘물타기’에 능숙한 이들도 있다. 정세에 따른 변화에 능한 그들은 ‘무임승차’를 즐긴다. 이와 정반대로 자신의 색깔을 드러낼라 치면 ‘왕따(왕따돌림)’가 될 각오를 해야만 한다.
98년 연구실적 평가미달이라는 이유로 재임용에서 탈락한 김민수 교수의 경우도 침묵을 강제하는 제도의 폭력을 상기하게 한다. 선배교수들의 친일행적을 들춰내고 비판한데 따른 ‘괘씸죄’와 ‘왕따’가 재임용이라는 제도를 통해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92년 『즐거운 사라』의 ‘음란성’ 때문에 유죄판결을 받고 98년 복직한 마광수 교수는 지난 6월 ‘학자로서의 학문적 결함’을 이유로 재임용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그 역시 ‘왕따’당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만화가인 이문세를 비롯해 마광수와 장정일의 경우 역시 침묵을 강제하는 제도가 행사한 폭력의 희생자라 볼 수 있다. 학문의 자유와 상상력의 자유를 탄압한 ‘집단 이지메’, 즉 ‘왕따’를 당한 것이다. 게다가 제도를 이용한 ‘마녀사냥’은 검열을 내화시킴으로써 자기검열에까지 이르는 부작용을 낳았다. 이들에게 진정한 비극의 시작은 피해의식 보다는 자기검열에 있다. 따라서 침묵을 스스로 강제하는 경우는 더욱 심각하다. 자기검열은 자신의 영혼을 좀먹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강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작동하는 검열의 감시체계를 운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악조건 하에서도 침묵을 깨트리고 대화를 재개해야하는 당위는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당위를 강화시켜줄 뿐이다. 누구도 자신의 비판이 허무한 메아리로 돌아오길 기대하지 않으리라 본다.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알고도 모른 척, 언제까지 침묵의 성에 머무를 수 있을까. 자신을 둘러싼 침묵의 벽을 허물고 나와 대답해야한다. 내가 여기 있노라고. 살다보면 입장을 드러내야할 때가 오기 마련이다. 누구든 ‘왕따’ 아니면 ‘물타기’를 선택해야한다. 외롭지만 순수한 ‘왕따’가 될 것이냐 비겁한 ‘물타기’를 선택하느냐의 문제는 바로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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