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우리 시대의 ‘국제성’] 다시 바라보는 ‘부산국제영화제’

우리 시대의 ‘국제성’
-다시 바라보는 ‘부산국제영화제’

이상용 / 영화평론가

부산, 만국박람회, 탈식민주의 그리고 축제

부산에서 일정을 보내다보면 기존의 시간 관념이 점차 사라져감을 느낀다. 요일을 따지기보다는 영화제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하는 식으로 사고방식이 흘러간다.
축제라는 특성이 시간 단위를 뒤바꾸기 때문이다. 이렇듯 시공간 개념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은 영화제가 자생적인 라이프 스타일을 갖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시간을 모으는 또 하나의 차원이다.
축제로서의 영화제는 일상이라는 시간을 뒤틀고 동시에 필리핀, 인도, 아이슬란드, 폴란드, 미국, 프랑스 등의 전세계 영화들, 즉 세계문화를 필름이라는 단위를 통해 한자리에 모아놓음으로써 문화 만국박람회라는 말을 가능케 한다.

안정성보다는 대안을
만국박람회의 글로벌하면서도 산업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논자들이 지적한 바 있지만 박람회와 영화제를 한 자리에 놓고 보면, 세계 문화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영화제는 박람회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그것은 겉으로 드러난 매혹인 동시에 감춰진 얼굴인 자본주의의 집적 내지는 제국주의적인 성향을 띤다.

여기에서 제국주의는 1차적 의미보다는 탈식민주의의 습성, 그러니깐 남의 떡이 좋아 보이는 이 땅의 문화 풍토와 연결된다. 부산영화제가 지니고 있는 규모와 프로그래밍들은 칸 영화제를 표방하고 있으며, 명실상부한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라는 가치 속에서 대안보다는 안정을 추구한다.
5회를 맞는 부산국제영화제를 돌아보며 우리 문화 속에 잠재된 ‘국제성’이라는 말은 제고해 볼 필요를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하자면, 부산국제영화제에 게스트(손님)로 와서 가장 불편을 느끼는 이들은 한국의 독립, 단편 영화감독들이다. 한때 영화제와 관련된 일을 하는 내게 그들은 술자리에서 외국 게스트에 비해 찬밥 신세를 당하는 것을 심히 불쾌해 했다. 외국 중심의 사고는 비단 영화제의 일만은 아니지만 두 자리가 화합되기 보다는 행사를 치뤄내는데 급급한 인상을 감출 수 없다.
부산이 명실상부한 아시아를 대표하는 영화제로 성장했다는 자평을 내면서도 실제로 대안 모색이나 창조성을 발휘하기보다는 안정과 거대한 규모를 지향해 왔다는 사실도 숨길 수 없는 비판점이다.

그 점에 있어 개막작은 부산국제영화제가 걸어 온 길을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이다. 5회의 영화제를 일구어오면서 한국영화를 개폐막에 포함시킨 것은 단 한번이다. 작년 4회 영화제에서 <박하사탕>으로 뜨거운 반응을 일으킨 것을 제외하고는 이란, 인도 등지의 영화가 첫인상을 대변했다. 물론 아시아라는 네트워크를 감안한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올 개막작인 <레슬러>만 해도 이미 다른 영화제에서 수상한 작품이다.
상대적으로 <박하사탕>은 부산에서 첫 공개되는 영화였는데 첫 상영이 가져다주는 신선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수상작들을 중심으로 상영작이 선정되고, 개폐막이 선정되는 부산국제영화제의 풍토는 안정 제일주의의 한국 문화양상을 확인시켜 준다.
한국 영화 역시 아시아의 영화임에도 새로운 작품의 발굴보다는 안정된 선택을 했다는 것도 내부의 방침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아시아의 숨은 가치를 발굴해야
부산국제영화제는 배우보다도 감독이 스타가 되는 영화제인데 24년만에 한국을 찾은 빔 벤더스(독일)가 단연 주인공이었다. 각종 언론은 빔 벤더스의 행적을 추적하기에 바빴는데 “부산은 아시아의 칸이군요”라는 것이 그의 도착 소감이었다.
아시아의 칸. 아마 부산국제영화제가 꿈꾸는 아니 한국사회가 바라는 말일 것이다. 부산 프로모션플랜(이하 PPP)이라는 마켓 창구의 규모를 점점 늘려 가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것은 영화제와 자본의 논리를 연결하겠다는, 세계 3대 영화 마켓 중의 하나인 칸 마켓처럼 아시아의 영화 산업의 중추적 역할을 맞겠다는 프로젝트다.
물론 비난할만한 것은 아니다.

십 년 전에 영화 산업이 붕괴한 대만과 영화 산업에서 다수의 관객들을 잃었고 투자자의 감소로 몸살을 앓고 있는 홍콩에서도 영화 문화를 지켜내기 위한 힘겨운 노력들이 이어지고 있는 추세다. 에드워드 양, 후 샤오시엔, 왕가위, 관금붕과 같은 아시아의 대표적 감독들은 상업적인 극영화를 만들어 자신들이 소유한 독립회사를 통해 배급한다. 새로운 감독들은 홍콩의 푸르트 챈에 보여준 실례를 따라 영화산업 밖에서 저예산 장편영화를 만들고 배급하고 선 보일 경로를 찾고 있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 PPP는 대화의 창구를 마련한다. 실제로 부산 PPP가 성립하기 이전에 아시아의 다른 영화제에서는 그런 개념이 없었다. 부산의 성공 이후 작년에 도쿄 필름 크리에이터스 포럼이 생겼고, 올해 홍콩 영화제도 아시안 필름 파이낸싱 포럼이라는 프리마켓을 열었다.
한 인터뷰에서 지안첸 감독이 고백했듯, 가난하게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PPP는 새로운 구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작품을 선정하고 배분하는 기준에 있어서는 문제가 된다. 시나리오와 아이템만으로 지원작을 선정하거나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없는 현실은 결국 안정된 신인들에게만 유리할 가능성이 많다.
그것이 부산이 처한 국제성이다. 아직은 기반이 불안해 보이는 부천판타스틱 국제 영화제나 이제 돌을 맞은 전주국제영화제의 맏형으로서 새로움보다는 보편성으로 무장하고 선례들을 만들어가야 하는 책임감이 어깨를 무겁게 만든다.

그러나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라는 규모는 있지만 아시아의 숨은 작품을 발굴하고 거두어 내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다. 얼마 전 끝난 베니스 영화제 역시 칸과 베를린으로부터 자기들의 목소리를 지키는데 그렇게 성공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관심을 모으기위해 수많은 할리우드 스타들을 모셔야 했으며, 샤론 스톤과 클린트 이스트우드, 해리슨 포드, 리처드 기어가 찾아왔다.
부산은 스타들의 각축장이 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의 이례적인 것 이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아 왔다.

3회 부산영화제가 끝나고 한 평론가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했는데 당시로서는 시기상조인 듯 보였지만 이제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성향까지도 스스로 돌아볼 때가 된 것 같다. 그것은 아시아가 처한 불안한 위치, 한국이 처한 이중적인 상황과 더불어 충무로와 할리우드, 부산과 칸 사이의 묘한 닮을 꼴을 취하고 있는 한국 문화의 글로벌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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