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호 [우리 시대의 ‘국제성’] 국제학술대회가 한국 현실에서 갖는 한 경향

김영민 / 한일대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따라잡기’ 게임을 그쳐야 따라잡을 수 있다

1996년, 한국을 찾은 서구 철학의 대가 하버마스는 요란스러워 차마 민망한 여러 모임을 마감하는 인터뷰 자리에서 “이제 한국의 철학도들은 불교와 유교 등 한국의 전통사상에 대해 좀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우리에게 ‘철학적 세계화’의 한 징검다리였던 하버마스의 충고는, 그가 이룬 보편성의 물꼬가 어디였으며 그 수위가 어떠했는가를 에둘러 들려주며 슬며시 우리의 “뒷딴을 친다.”
2000년, “세계화시대의 문화올림픽에 비유될만한 국내 초유의 지적 이벤트”라는 <2000년 서울 국제문학포럼>의 조직위원장 김우창 교수는 “이번 포럼이 우리 작가들의 의식의 테두리를 세계적 지평으로 넓히는 것은 물론, 외국 작가들에게도 한국을 그들의 의식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행사의 의의와 기대를 밝혔다. 이 공식적 ‘세계화’와 ‘지식정보화’의 시대, 세계의 지성들을 불러들여 우리 의식의 테두리를 세계적 지평으로 넓히자는 데야 감히 누가 나서 손사래를 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방식을 헤집어 잠시 까탈을 부려본다면, 어째 하버마스가 한 번 더 와서 재차 충고를 해야될 듯도 하다.
생각이 있다면, 사상과 그 담론이 마치 물품의 교역(交易)에서와 같이 일차원적 왕래와 겹침에 의해 보편성을 띠면서 자연스레 ‘세계화’하는 것이라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근자 ‘세계화’의 분위기에 편승한 듯 유달리 잦은 국제학술행사를 변명하는 언설은, 마치 정신적 지평이 다만 외연(外延)의 확장으로 환원될 수 있으리라는 낙관주의 슬로건 일색이다. 매사가 그런 식이다. 단도직입하자면, 이런 식의 태도가, “우리 의식의 테두리를 세계적 지평으로 넓히는 것”이라는 현란한 구호 속에서 이름난 개인들 사이의 ‘따라잡기’만을 끝없이 반복하고, 결국 피상적 교류 속에 지적 허위의식만을 재생산하게 하는 것이 아닌지를 진지하게 되물어야 할 것이다.

국제학술대회가 무역박람회장인가
이와 더불어, 이 따라잡기의 피상적 실적에 가려서, 정작 ‘따라잡기’의 문제로 환원될 수 없는 우리 학문의 인프라와 그 구조적 한계가 우리의 문제의식으로부터 실종될 수 있다는 점이 세세하게, 자기성찰적으로 지적되어야 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의 행사로 인해 대중적으로 파급되는 문화적 거품 속에서, 이벤트성의 회합이나 개인의 교류 등으로 풀어낼 수 없는 우리 학문현실의 파행적 구조와 그 특성이 슬며시 망실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진중하게, 발본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구식의 근대와 함께, 그 근대를 넘어가야 하는 이중의 과제 궠?표현으로는 ‘심층근대화’의 과제?가 우리에게 부과된 시대적 소명이라는 데에 동의한다면, ‘세계화’에 쏟는 관심과 노력 못지않게 ‘자생성으로서의 주체성’ 문제를 풀어내기 위해서 열심을 부리고, 그 열심의 연대를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더구나, 문화적(학문적) ‘따라잡기’ 전략으로서의 세계화란, 필경 그들을 따라잡을 수 없을 때까지만 유효하게끔 구조화된 ‘따라잡기’ 게임으로 끝나지 않겠는가? (후기) 자본주의적 서구화라는 행로에서 벌어지는 그 게임의 법칙을 바꾸지 않고서도, 신종속(新從屬)의 체제를 비껴나가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으리라고 낙관하는가? 우리 속의 몇몇 세계시민적 지성들이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풍경’에 안심하고 즐거워하는 그 사이, 바로 그 풍경이 이면의 왜곡된 구조를 은폐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김우창 교수는, “세계가 하나의 테두리로 재편되면서 우리가 부딪치는 문제가 곧 세계 모두의 문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면서, 이 행사의 문화사적 배경을 설명한다. 이것 역시 자폐적 국수주의자나 고고학적 귀소주의자가 아니라면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특히 김 교수같은 학문적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같은 의사보편주의적 슬로건으로 사태를 상투화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이것은 세계화의 실질적 주체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논리이며, 이러한 명제는 상투적 도식을 따라 무반성적으로 재생산되어 그 논리를 강화해 준다. 따라서, 이같은 언설은 일종의 강박이나 피해의식에 의해서 ‘따라잡기’ 세계화에 휩쓸려들 수 밖에 없었던 주변부의 문제의식을 반영할 수 없으며, 심지어 그 문제의식을 사상(捨象)하는 강력한 알리바이로 기능할 수도 있다.
가령, 나는 “우리가 부딪치는 문제”로서 단지 우리의 특유한 문제, 또 개인들의 ‘따라잡기’ 전략으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학문 인프라의 문제를 여럿 열거할 수 있다. 적절한 하나의 사례가 번역의 난립상일 것이다. 동시통역을 통한 몇몇 개인들의 교류가 이루어지는 화려한 무대의 저변에는, 우리 학문의 인프라를 그 근본에서 조롱하는 번역의 문화(文禍)가 견고히 똬리를 틀고 있다. 나만 해도, 오역(誤譯)과 비문(非文)으로 가득한 학술 번역서 때문에 파산하다시피 한 수업시간이 한 둘이 아니다.

화려한 실적보다 자기성찰이 우선
여기에서도 주목해야 할 것은, 읽을 만한 번역서를 찾다가 결국 절망 끝에 원서를 되집어 오게되는 그 구조가, 바로 다름아닌 ‘따라잡기’의 게임이 끝없이 반복되는 바로 그 구조라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세계화된 언어로 세계인들과 교류해야 한다는 채근도 더러 필요하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누구나 그 세계를 쉽고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한글화하는 체계적인 노력과 그 인프라의 구축일 것이다.
특히 우리 학문의 인프라 구축은 몇몇 개인들의 특권적, 기회주의적 교류와 혼동될 수 없다. 굳이 관련짓다면, 그 행사와 교류는 우리의 주체적 인프라망이 자연스럽게 개화(開花)시킨 꽃이 되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그런 식의 행사가 우리 학문구조의 문제점들을 희석, 혹은 방치시키고, 끝없는 ‘따라잡기’의 행태와 강박을 조장하는 계기가 되어서는 정말 곤란하다. 우리에게 세계화란 더 이상 따라잡기가 되어서는 안된다. 아니, 따라잡기의 판을 뒤집을 수 있을 때라야 필경 우리는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http:sophy.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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