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호 [가상현실 특집] 삽살 독(dog): 학(항)문의 길

pulp fiction, parody, adrenaline

삽살개/패러디 소설가

“인간이 향상하려면 자신의 무식을 항상 기억해야 하는데, 자기가 아는 바를 그처럼 자주 사용해야만 하는 그가 어떻게 항상 자신의 무식을 기억할 수 있겠는가?”(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대학원에 어쩌다 등장하는 그를 두고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하긴 그의 정체는 좀 의심스럽다. 한 손에는 항상 소로우의 『월든』이 들려있고, 바람처럼 나타났다 수업이 끝나면 흔한 뒷풀이에 참여하는 일없이 어느새 사라진다. 정말 간혹 뒷풀이 자리에 등장한다고 해도 그건 뒤늦게 왔다 재빠르게 자리를 뜨는, 일종의 찰나일 뿐이다. 소수의 사람들은 그런 그가 대학원이라는 곳에 어째서 왔는지 들은 적이 있다. “학문의 길.” 이 비장한 단어가 그의 입에서 나왔을 때 삐뚜름하게 쓴 모자 아래 눈동자가 그렇게도 반짝이는 것을 본적은 없다. 하지만 모자를 눌러쓰고 좀 지친 얼굴을 한 그의 표정은 마치 삽살개 같다.

“사람들은 눈을 감아버리거나, 졸거나 또는 허식에 속아넘어가기로 동의함으로써 자신들의 인습적인 일상 생활을 확립시킨다. 아직도 이 일상생활은 순전한 허구의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삽살개는 문학 평론가인 H를 만난다. H는 최근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무크지를 구상 중이다. H는 뒤늦게나마 자신들의 잡지에 문화에 관련된 내용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삽살개한테 도움을 청한 것이다. 그는 거절하는 법이 없으니까. 하지만 몇 가지 원칙은 있다. 공짜는 안된다. 청탁내용이 너무 저속해서는 안된다. 기한이 하루밖에 되지 않았을 때는 거절한다. 주고객에게는 원고료를 술로 할인(?)해 준다.
“이런 내용의 글이에요. 가능하겠죠. 무원씨.”
“젊은 사람들의 냄새가 풍기네요. 날짜가 좀 빡빡하지만 최선을 다해 볼께요.”
삽살개가 일어서면서 다시 말을 건넨다.
“그런데 현선배는 이런 일을 왜해요. 좀 뭐랄까 너무 상업적인 마인드 아니에요.”
그렇지만 H는 이미 컴퓨터로 시선을 보낸지 오래였고, 날렵하게 마우스를 잡으려 버튼을 눌러대고 있었다.
“아이, 씨. 또 죽었네. 무원씨는 지뢰찾기 같은 것은 잘 안하죠?”
삽살개는 황급히 자리를 뜰 필요를 느낀다. 이제 원고청탁이 들어왔으니 이번 주 수업에 참여할지는 미지수다.
이렇듯 본말이 전도된 생활을 하는 것을 본 한 선배가 한번은 다그치듯 물었다. 그렇게 바쁘게 생활을 해서야 어디 공부라는 것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맞는 말이다. 그래서 삽살개는 언제나 책을 가방 가득 들고 다닌다. 누구라도 그의 가방을 자리에서 빼앗아 들여다보았다면 마치 고3들의 책가방 같은 무게에 놀라고 말 것이다. 집에 당도한 삽살개는 자신의 컴퓨터의 전원을 켠 다음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차분히 자리에 앉아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대학원의 여러 풍경들>
- 문화 평론가/ 이무원
어느날 한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이제 막 대학원에 들어간 그는 비록 학교는 달랐지만 문화적 충격을 벗어날 수 없는 까닭에 나를 찾은 것이다. 상담 내용의 요지는 이러했다. 자신의 학교 교수가 프로젝트를 하나 가져온 모양인데, 친구는 학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프로젝트를 수행한 이는 총 7명인데 교수는 50만원을 내놓으며 답사 및 지역 방문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막 학기가 시작되자 교수로부터 또 하나의 지시가 내려왔다는 것이다. 개인당 10매씩 보고서를 제출하라고 말이다. 여지껏 아무 말도 없이 외국 여행을 갖다 온 그가 갑자기 서둘러서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의도를 알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경험을 동원하여 아마도 프로젝트의 논문 제출일자가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그런데 한 프로젝트가 최소한 3백 만원 이상이니깐 너희들이 받은 경비는 턱없는 비용이다라고. 최소한 반땅은 이 곳에서 상거래의 원칙이라고. 그 친구 역시 교수가 무슨 돈으로 외국 여행을 갖는지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아무튼 이것이 대학원 초년생이 겪어야하는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다. 소수이기 때문에 학문의 길이 넓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관계가 좁아지면서 생기는 모순들...




삽살개는 단박에 써내려간 자신의 원고를 보고 조금은 흡족해 한다. 나머지 사실들은 정리만 하면 된다. 아마 H도 만족할 것이다. 문득 시계를 보니 바늘은 벌써 오후 6시를 가리킨다. 약속 시간이 다되었다. 삽살개는 책을 집어들고 집을 나선다.

“오랜만입니다.”

삽살개는 그녀에게 살짝 눈인사를 한다. 이 만남은 삽살개가 비즈니스라고 부르는 여러 관계 중의 하나이다. 비싼 대학원 등록금 마련을 위해 남들도 다 하는 일이다. 삽살개 주변만 하더라도, 동종의 업종인 문화 평론가 겸 대학원생인 K가 전공을 살려 영어학원선생을 하고 있고, 또 다른 K는 시인으로 등단했음에도 논술지도를 하며 대학원에는 주로 술을 마시러가고, 좀 현명한 L은 학생회 간부가 되어 인간관계 운운하며 삽살개를 괴롭히기 일쑤다. 이러한 운명은 삽살개에도 예외는 아니다. 다른 학교를 다니지만 전공이 같은 그녀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싶은 유부녀다. 여기서 무슨 불륜의 드라마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삽살개는 그녀에게 전공과 관련된 영어를 가르친다. 가끔은 식사를 대접받고, 레포트도 대신 써주기도 하고, 논문 계획도 함께 세우고 있다. 아마 논문 역시 삽살개의 몫이 되지 않을까 싶지만 그 이상의 관계는 없다. 철저한 비즈니스다. 삽살개는 지인들로부터 논문을 대신 써주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보통 박사급은 오 백 만원, 석사급은 삼 백 만원 정도를 받는 다는 것이다. 그 정도면 등록금을 내고, 술을 실컷 마실 수 있다.

“오늘은 제가 술을 한잔 살께요.” 그녀로부터 제안이 들어왔다. 하지만 삽살개는 내일까지 원고 마감이 있다. 좀 불안하다.
“글쎄요.”
“그냥 가볍게 한 잔해요.”

그렇게 술자리는 시작되었지만 결코 가볍지는 못했다. 그녀도 만취해서 집으로 들어갔다. 남편이 출장 중이란다. 그래서 삽살개는 타이르듯 한마디했다. 그럼 공부할 시간 많으니까 책 좀 보세요라며 『월든』을 냉큼 빌려주었다. 그녀는 가방에 집어넣으며 택시를 잡기 위해 술집을 나왔다. 취중에 언뜻 그녀의 젖가슴이 서늘하게 삽살개의 어깨 위에 내려앉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택시는 빨리 잡혔고, 삽살개는 그녀를 먼저 보냈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다음날 부랴부랴 원고를 마친 삽살개는 그의 주업무인 영화를 보러갔다. 한쪽 구석에 앉아 음침하게 스크린을 응시하다 삽살개는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엔딩 대목의 웅장한 사운드에 몇 번 몸을 들썩거리기도 했다. 삽살개는 생각했다. 졸았을 정도면 나쁜 영화다. 아직 술이 덜 깬 얼굴을 하고서 그는 이렇게 안위했다.

“무원씨!”
“안녕하세요”
“이 영화 어땠어요. 너무 좋죠.”
“아, 예. 화면이 아름답던데요.”
“꼭 무원씨 취향 같아요. 원고 청탁 부탁해도 되나요.” 삽살개는 순간 당황한다.
“그러세요. 언제까지요.”

문화평론가인 삽살개는 한 가지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한번 청탁을 거절하면 다음 번에 기회가 주어지기란 여간해서는 어렵다는 것을. 그래서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서라도 원고를 마련해야 한다. 겨우 원고지 십 매인 데. 하지만 보지 못한 부담감이 너무 크다. 인터넷을 뒤져서라도 몇 장면은 다시 건져봐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 삽살개에게 핸드폰이 울렸다.
“원고 청탁이요. 예 알겠습니다.” 모 학보사에서 ‘엽기’를 소재로 짧은 글을 하나 써달란다. “방송 출연이요. 글쎄 그건 좀 곤란하겠는데… 예, 그럼 전화번호 주시면 제가 다시 연락 드릴께요.” 또 벨이 울린다. 그녀로부터 전화다. 급한 레포트가 있단다. 지금 아기 때문에 자신은 시간이 없단다. 알고 보면 그녀의 처지도 딱하다. 남편, 아이, 시댁의 눈치를 보느라 학문을 해야 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기꺼이 응하기로 한다. 그러고 보니 내일까지 제출해야 할 자신의 레포트는 턱없이 순서가 밀려있다. 삽살개는 담배를 피우며, 핸드폰의 전원을 꺼놓는다. 학문의 길은 이렇게 힘든 것인가.

그는 대학원에 와서 최근 1년 동안 전공서적을 거의 읽어본 기억이 없다. 그래서 몇 번의 휴학을 거치며 꽤나 오랫동안 대학원을 다녔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는다. 이제 박사 과정에 들어가려면 돈도 더 모아야 하고, 1주일에 한번씩이나마 연락하는 애인을 기쁘게 해 줄 비용도 만만치 않다. 그녀 역시 대학원생이기에 1주일에 한번 만난다는 사실에 불쾌함을 느끼지는 않는다. 삽살개는 결혼을 서두르지만, 막상 말을 꺼낼 처지는 못된다. 둘 중 누구하나라도 학문을 끝내고,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하지만 어떻게 그런 막중한 책임을 맡길 수 있겠는가. 화장실에 앉아 자신의 항문을 닦아내며 그는 학문의 길이 험하고도 멀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한다. 그리고 오래 전 숲으로 떠난 소로우를 떠올린다. 하버드 대학을 나왔지만 월든 호숫가 숲 속에 들어가 자급자족 생활을 2년간 시도했던 초로의 모습을. 하지만 어찌 생각해보면 삽살개의 모습 역시 자급자족을 위한 숲 속의 생활인지도 모른다. 단지 자연 대신 자본과 권력과 학문의 이름이 들어차 있을 뿐이지. 삐리릭! 다시 핸드폰이 울린다. 아마 『월든』을 빌려준 그녀 같다. 분명 첫마디는 이럴 것이다. “이 책 너무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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