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호 [가상현실 특집] 네트의 기생수, 날강도, 그리고 반칙왕을 조심하라

이광석/뉴미디어 평론가

미국의 좌파 지리학자인 데이빗 하비는 몇 년전 알튀세리앙들의 잡지인 『마르크스를 재고한다Rethinking Marxism』에 실은 자신의 기고문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미래상을 점검하면서 자본주의를 “모든 것을 파괴하면서 달리는 브레이크 없는 기차”와 같다고 표현한 적이 있다. 이는 인간 삶과 의식의 미시적인 결 하나 하나에까지 자본의 거대한 기차가 무참하게 휩쓸고 지나감을 의미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브레이크 없이 휘몰아가는 현대 자본주의의 의식적 체제 ‘동원’(mobilization)의 속도전을 연상시킨다. 이는 물질과 의식 모든 영역에서 질곡을 만들어가는 자본주의 미래의 우울한 비전이다.
미래에 대한 어두운 비전은 희망의 가능성을 절대적으로 부정하고 출발하지는 않는다. 항상 그 둘의 긴장 관계를 놓치지 않는다. 예컨대, 인터넷이란 새로운 매개체를 통해 우리는 억압과 희망의 꿈을 동시에 꾼다. 마찬가지로 이 꿈은 분명 미래에 대한 전혀 근거없는 상상만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즉 현실에 근거한 꿈이고 그래야만 한다. 마치 이는 사이버펑크 작가들이 ‘외삽법’(extrapolation)이라는, 역사적 현실을 근미래적 전망 속에서 반추하는 작업을 통해 서사를 구성하는 것과 동일하다. 사이버펑크의 ‘상상할 수 없는 것’의 전망이나 예상이 판타지로 빠지지 않는 실제적 근거는 80년대 이후 보수적 정치체제의 후원을 입은 거대기업의 약진, 초국적기업의 헤게모니가 만들어내는 신세계,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 중심/주변 관계, 중간계급의 소멸, 고삐풀린 자본주의의 약탈적 탐욕 등의 현실적 조건에 응했기 때문이다. 억압과 희망의 긴장 속에서 얻어진 꿈은 실제 이같은 현실의 고름을 터뜨리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얻어질 것들이다. 인터넷의 미래는 이처럼 자본주의의 육체적 조건인 피고름과 거대 자본의 ‘반칙왕’이 휘두르는 흉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미래의 감지는 그래서 살벌하다.

산소같은 기생수(寄生獸)
현재 남한 국민 3명 중 1명이 인터넷을 이용한다고 한다. 이 추세대로 가면 내년 상반기에 인터넷 인구가 2500만명이라는 진단도 나온다. 이 작은 나라에서 인터넷은 우리의 미래의 사활이다. 광고, 쇼, 퀴즈, 뉴스 할 것 없이 인터넷에 광분하고 있다. 코스닥이 생기고, 수많은 벤처에 젊은이들이 몰려든다. N세대가 격상되고, 젊은 벤처사장이 잡지의 표지 모델을 장식한다. ‘정보사회’론도 이제 한물간 논의가 되어버렸다. 요즘은 노골적으로 ‘신경제’라는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앞세워, 경제 논리를 그 중심에 세워버렸다. 미국 다음의 인터넷 강국이란 수식어도 나온다. 이제 386세대의 귀하신 몸들은 운동의 전망을 벤처에서 구상한다. ‘정보’, ‘신(新)’, ‘지식’ 등의 수사는 대학의 학과 명칭, 학제 등 온갖 곳에 달라붙는다. 이 수사 없이는 우리는 미래에 숨도 쉴 수 없는 상황에 이를 것이다. 마치 MIT 컴퓨터사이언스 랩의 마이클 더투조스가 미래 컴퓨터가 사물 속에 이동하고 감춰지는 미래를 예측하며 내놓은 ‘산소 프로젝트’처럼, 이 정보의 수사들은 우리 인간의 ‘산소‘ 역할을 자임한다.
그 기술적 미래의 판단을 유보하더라도, 앞서 열거한 남한 현실의 ‘산소 프로젝트’들은 ‘동원’의 체제 논리이다. 어디서든 발견하고 유포되는 ‘산소‘라고 주장하는 것들. 정보의 수사는 산소와 같이 육신의 영위를 조율하는 자원이 아니다. 마치 이와아키 히토시가 그린 ‘기생수’에 가깝다. 현재의 과도한 수사들은 외계생물로 인간의 몸에 기생하여 인간을 장악하는 잔인하기 그지없는 괴물과 같은 ‘기생수’다. 그들에 의해 자율 신경이 장악당한 인간처럼, 정보의 수사는 그렇게 유포된다. 인터넷을 둘러싼 논의는 계속적으로 기생수들의 장악 과정에 처할 것이다. 사방팔방 매체들을 점거한 기생수들의 프로파겐더는 그들이 단지 인간들에게 산소같은 존재임을 설득하는 장미빛 메시지로 가득찰 것이다.

코드를 휘두르는 날강도
이제 인터넷에서 장사하던 닷컴들의 사망 신고가 줄줄이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슈퍼닷컴’들만이 살아남는 시대가 도래한다는 얘기다. 현실 자본의 규모 논리가 닷컴에도 예외가 아니라는 소리다. 인터넷이 희망과 경쟁의 프런티어인 시대가 진정 몇 년이던가. 자본주의의 산업혁명 시기 이후 자본의 역사를 상기만 해봐도 이렇게 독점의 구도가 철저하고 빠르게 엮어지진 않았다. 아이러니 한 것은 오히려 이 새로운 디지털 경제의 시대에 독점을 뒤엎는 기회가 더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근거는 기술적 ‘코드’에 있다. “삼성의 기술이 만들면 ‘표준’이 됩니다”라는 광고의 사기성 발언은 사실 이에 근거한다. 독점이 기술적 코드를 장악하면, 이를 뒤집는 작업은 극히 힘들어진다. 이런걸 가지고 신경제 이론하는 자들은 ‘록인’(lock-in)이라 부른다. 안에서 걸어 잠근다는 얘기다.
최근 신경제와 관련한 재밌는 글을 서술한 하버드대학의 로렌스 레씩 또한 ‘코드’의 논리가 신경제 논리의 핵심임을 분명히 지적하고 있다. 자본 독점체가 장악한 기술적 코드는 표준이 된다. 주먹과 힘의 현실 논리가 닷컴들에 누적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삼성이 ‘국내’에서 표준을 호언장담하는 카피 문구는 공식 협박이기도 하다. 날고 기어봐야 사실상 삼성의 손바닥에 있다는 얘기다. 로베르토 디 코스모의 표현을 빌린다면, 이는 ‘날’로 먹는 ‘강도’의 논리다. 공정한 게임의 룰을 더욱 찾기 힘들어진 자본주의의 미래는 이렇게 또 다시 기술적 코드로 힘을 배가한 디지털 ‘날강도’들의 자본 증식과정의 연장일 수 있다.

포크를 휘젓는 반칙왕
기생수와 날강도가 판쳐도, 인간이 이 새로운 체제에 반응하는 방식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 시스템의 질곡은 끊임없이 반(反)정보를 생산해낸다. 체제의 질곡은 ‘역능’(potentia)에 비례한다. 역능은 권력에 반하는 가능성의 힘이다. 한 시스템 내에서 사물의 쓰임새는 체계적 권력과 게릴라식 역능들의 경합 과정에서 결정된다. 그러나, 그 양자의 힘겨루기 과정은 대체로 ‘동원’을 위장하기 위한 연막으로 판명나고 체제에 손을 들어주기 십상이다. 대개가 시스템의 거대한 흐름에, 브레이크 없는 기차에 동승해야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외연상 미래에 억압과 이에 반한 희망의 가능성이란 ‘양날의 칼’로 보이던 것들이 억압의 칼로 바뀌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얘기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버팅기는 역능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 거대한 혁명 또한 기존의 전철을 밟을 수 있는 여지가 훨씬 크다.
자본주의의 링 위에서 페어플레이를 순진하게 요구하다 ‘반칙왕’의 흉기에 무참히 마빡이 깨지듯, 장미빛 가능성을 포함한 미래 예측의 순진한 구도는 링 안과 밖에서 무자비하게 휘두르는 자본의 반칙을 충분히 전제해야 한다. 그래야 각자의 마빡이 터지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칙왕’이 휘젓는 포크를 조심해야, 그를 때려눕힐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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