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호 [가상현실 특집] 미래사회를 가늠하는 두 가지 잣대- 시민과 시장

하승우/경희대 정치학 박사 1차

미래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은 이성적인가? 미래학자들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막스 더블린에 따르면, “사실 이성의 너울을 쓰고 추세들을 뒤쫓고 있는 우리 본성의 한 부분은 대단히 불합리한 요소들을 갈망한다. 오웰이 힘에 대한 공포와 숭배의 요소들을 현대의 미래성 때문이라고 잘 지적하였거니와,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추세를 뒤쫓는 심리는 군중심리이다.” 현재 나타나고 있는 미래에 대한 기대들은 이런 군중심리들을 상당정도 반영하고 있다. 군중심리의 무서운 점은 그것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이루어지기 전에 그것을 무조건적으로 인정하고 수용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따라서 미래를 논한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어떤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보다 다소 겸손한 역사인식이 필요할 것 같다.

유럽 시민권, 우리의 시민권
국민국가(nation-state)를 통해 근대의 문을 열었던 유럽은 이제 스스로 그 한계를 넘어 새로운 정치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국민을 넘어선, 민족을 넘어선 새로운 초국가적 시민권(trans-national citizenship)을 구성하려는 시도이다. 경제통합에 비해 속도가 더디기만 했던 정치통합은 최근 “연방국가로의 통합(from Confederacy to Federation)”을 내세운 피셔(Joschka Fischer)의 발언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하지만 하이더로 대변되는 극우정당의 집권세력화, 각 지역의 분리주의 움직임, 이민노동자에 대한 억압과 배제, 여성의 불안정한 지위 등은 정칟경제적인 통합보다 일반 시민차원에서의 통합이 어렵고 먼저 해결되어야 하는 선결조건임을 보여주고 있다. 왜 국민이 아니라 시민이고, 시민이란 어떤 개념인가에 대한 물음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의미있는 통합은 불가능하다.
뒤늦게 국민국가로의 통합을 시도하고 있는 남북한 역시 이런 물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50년 이상을 분단되어 살아온 서로 다른 두 공동체의 국민을 하나의 공동체의 시민으로 통합시키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상황이 더욱 어려운 것은 세계화, 지방화의 시대에 국민국가의 국민으로는 미래에 대처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세계공동체와 지역공동체의 시민으로 질적 변환이 동시에 요구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국민국가로의 통합과 함께 그것을 뛰어넘는 질적인 변화까지도 요구받는 것이다.
북한은 오랜 폐쇄성과 주체사상이라는 집단주의철학(collectivist philosophy)으로 인해 시민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지도 발전되지도 못했다. 남한에서도 87년 이후에야 시민이라는 개념이 제시되었고 인종이나 성에 대해 강한 폐쇄성을 보이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가족에 대한 효가 국가에 대한 충으로 직접 연결되는 유교적인 가부장 구조는 민주적인 시민권 형성을 방해하고 있다. 따라서 남북한은 통일에 필요한 새로운 시민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양쪽의 잘못된 개념이 지양되고 새로운 시민이 형성되어야 통일 후에 벌어질 갈등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통합의 기반이 되는 사회문화적, 정치경제적 차이에 대한 인정과 분석이 선행되어야 지리적인 영토구속성을 추구하는 일차원적인 근대적 통합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생활공동체로서의 시장
시장의 힘은 매섭다. ‘역사의 종말’이라는 후쿠야마의 건방진 소리는 이제 조금 더 세련되고 완화된 모습으로 바싹 다가와 있다. 개인의 삶은 스스로 돌봐야 하는 적자생존의 논리에 종속되고, 교환가치를 지니고 있지 못한 인간은 삶을 구성하고 자신을 발전시킬 기회를 박탈당한다. 합리적 선택과 경쟁에 근거한 냉혹한 시장논리는 인터넷이라는 물결을 타고 서핑해 들어오고 있다. 이런 시장논리는 피할수 없는 것인가?
아날학파의 태두 페르낭 브로델은 다른 설명을 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은 인류의 역사와 문명에 대한 저항이 아니다. 자본주의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고 그 밑에는 활발하게 움직이는 시장경제가 존재하고, 최하층에는 역사의 무게로 신음하면서도 끊임없이 행위하는 민초들의 문명이 존재한다. 즉 브로델에서 문명은 자본주의가 무너져도 존속하는 것이고 market으로서의 자본주의 시장과 인류의 역사적 전통으로서의 시장이 구분된다.
한국에서도 이런 전통이 존재한다. 우리 기억 속의 시장은 현재 존재하는 대형 할인마트의 세계처럼 차갑지 않고 단순한 교환의 장소도 아니었다. 그 속에는 흥정도 있었고 차력사들의 공연도 있었다. 물건만을 사고 팔기 위한, 자동차가 없으면 갈 수 없는 대형 할인마트와는 비교할 수 없는 따뜻함이 서려 있는 시간이었고 공간이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사이버 쇼핑몰이나 대형 할인마트에서 가격의 노예가 되어 아무런 흥겨움 없이 헤매고 있다.
그러므로 시장개인주의(market individualism)에서 벗어난 다양한 실험들이 가능할 것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지역통화운동에 근거한 새로운 공동체 건설도 그렇고, 한살림같은 생활공동체 운동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앙리 르페브르는 현대의 고독을 소통의 부재가 아니라 풍요에서 찾는다. 사람들은 대화-소통-참여-통합에 대한 끊임없는 강박관념을 받으며 살고 있다. 르페브르에 따르면, “새로운 것은 수다 속의 고독이고, 지나치게 많은 기호들 속에서의 의사소통의 부재이다.” 너무 많은 정보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우리는 어느 것을 결정하지도 행동하지도 못하고 있다. 현실에서 생활하고 있는 구체적인 사람들과의 부대낌이 있을 때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

터미네이터의 교훈
미래는 결정되어 있지 않다. “터미네이터2”에서 ‘no fate’를 탁자에 새기는 여전사의 모습은 미래가 우리의 의지와 무관하게 결정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미래는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그 길은 ‘제 3의 길’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길로 펼쳐져 있다. 우리가 선택하는 것은 그들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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