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호 [性혁명에서부터 비아그라까지] 한국문학 속의 性

최근 한국문학에 나타난 여성소설의 性의식

김은하 / 문예창작학 박사 수료

린 헌트가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라는 흥미로운 책에서 프랑스 혁명의 박애정신이 여형제를 배제한 남형제들만의 그것이었다고 지적했던 것처럼 우리의, 새로운 역사로의 이행은 성별이분법에 기초해 가부장제가 재질서/재강화된 반쪽짜리 근대화였다. 해방이후의 건국운동과 전후의 급속한 자본주의화의 과정 속에서 ‘여성의 진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기와 자궁을 가진 유인원에 불과했던 여성들은 불평등한 시장의 예비노동력으로, 사적 가정에 고립된 어머니와 아내로 실존의 이름없는 타자로 살아왔다. 그러나 이십세기 말 90년대 문학 공간으로, 축출되었던 ‘악녀들’이 회귀해 오기 시작했다. 자기만의 언어를 고집하는 이들은 노동과 인권 차원에서의 여성해방을 요구하며 ‘온당하고 정상적인’ 싸움을 벌였던 80년대의 페미니스트들과 달리 낭만적 사랑과 그것에 기반해 있는 가족을 거스르며 섹슈얼리티에 대한 ‘불온하고 비정상적인’ 싸움을 시도한다.

  은희경의 여성들은 이러한 모반을 시도한 최초의 나쁜 여자로 기록될만하다. <먼지 속의 나비>, <그녀의 세 번째 남자>,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등의 작품에서 그녀들은 낭만적 사랑의 이념을 훼손하며 사랑 대신 섹스를 택하는 극단적인 모험을 감행한다. 근대가, 전근대에서 간통과 동일시되었던 사랑과 성을 일부일처제와 합법화된 가족 제도 안으로 끌어들이지만 남녀 평등에 대한 약속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종속과 남성의 지배라는 가부장적 질서를 강화한 것이었다고 할 때 은희경 인물들의 낭만적 사랑과 성에 대한 냉소는 가부장제에 대한 적극적인 거부라 할 수 있다.

  이렇듯 90년대 여성 작가들은 기든스의 말대로 플라스틱 섹슈얼리티(재생산없는 섹스, 섹스없는 재생산)의 발명에 기초해 성이 ‘관계외적인 속성’이 아니라 내적인 속성 -친밀성같은- 에 의해 유지되는 ‘순수한 관계’를 모색하기 위한 기제로 떠오른 탈근대적 징후를 반영하고 있다. 『플라스틱 섹스』 연작을 통해 이남희는 억압적인 이성애 대신 동성애를 선택한다. 그것이 좀더 평등하며 의사소통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성은 결코 운명이 아니며 친밀한 관계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선택의 대상이다. 정상적이고 운명적이며 유일한 성으로 인정되는 이성애는 이남희에게 가부장제 문화 속에서 구축된 발명품에 가깝다. 이남희에게 섹슈얼리티가 가부장제 해체를 위한 생활정치이자 문화운동이라면 ‘자아주의자’인 전경린에게 그것은 자기본질에 이르기 위한 순수한 쾌락의 분출이며 일상성의 허위를 극복하기 위한 생에너지의 근원이다. 어떤 상징질서에도 갇히지 않는 본질적 자아로 귀환하기를 열망하는 그녀들에게 섹슈얼리티는 초월을 위한 비상구이다. 『아무 곳에도 없는 남자』에서 주인공이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와의 성관계를 통해 다다르는 곳은 자신의 몸과 성은 어느 누구에도 속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녀들에게 섹스는 성기에 고착된 육체적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비상을 위한 정신적인 행위이며 자기방기가 아닌 자기구축이다.

  이 짧은 지면에서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변화의 맥락이나 성과와 한계를 논하기란 불가능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일탈이나 방종과 같은 도덕적 비난의 잣대로 재단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억압적인 성규범과 그것이 기반하고 있는 인간(사회)관계에 대한 전복적 힘은 소중하지만 그것이 과연 구조에 대한 근본혁명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순수한 관계가 가질 수밖에 없는 유동적이고 일회적인(사랑이 없으면 언제든지 이별인) 불안정성은 영원성에 기초한 낭만적 사랑만큼 혼란스러운 것이지 않을까?(혼란을 두려워하는 것자체 정상성과 보수성의 이데올로기에 매여있는 것이라고?) 공동체의 안정성과 연대성이 훼손되고 개인의 단자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사랑의 구원신화는 비록 그 내용과 형식이 달라진다 해도 종교적 열정만큼 뜨거워질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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