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호 [생태주의와 대안사회] 총론 : 21세기 대안운동과 생태주의

생태주의를 둘러싼 논의지형의 성숙이 시급하다

이지영 / 청년생태주의자 KEY

‘위기의 시대’ 20세기가 그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 동안 20세기에 부딪쳤던 오류와 한계들이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맞이하여 어떤 대안들을 맞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다양한 패러다임 논의가 있어 왔다. 생태론에서도 이러한 패러다임 논쟁들은 이미 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현재는 다양한 담론 형성의 필요성이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이는 지배 패러다임들과 이에 대한 대안 패러다임들 간의 완결지향적 압박감 속에서 파생된 한계들을 보충하려는 시도이다.

  대안패러다임은 민중의 손으로

  문순홍은 그의 저서 『생태학의 담론』에서 “역동적인 그물망으로 얽혀 있는 생태적 문제를 거시적인 측면에서 느리게 변화하고 있는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분석하기 어렵다. 또한 시민사회 혹은 병렬적인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는 생활세계의 특성을 고려할 때, 생태 패러다임론의 자유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의 틀을 넘어 대안 민주주의와의 친화성을 높이는 담론 분석의 틀이 요구된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엄밀한 의미 부여와 이론적인 해석을 통한 담론의 형성을 주창하고자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로부터 다양한 대안담론들이 대두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위기의 시대를 넘어 21세기에 대안사회로의 변화를 이루는 것은 오직 이를 바라는 민중들의 힘으로만 가능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생태운동은 1960년대의 환경 개량주의를 반대하고 비판하면서 70년대 들어 처음 등장하였다. 먼저 ‘근본 생태론’이 대두되었는데, 이는 자연을 감각적인 주관성을 지닌 타자의 한 형태로 간주하고 자연이 우리 인간들의 착취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윤리적이고 책임있는 새로운 법전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반인간적 경향성이 국내에서는 환경단체의 보수주의적 성향과 맞물려 환경위기의 사회구조적 원인들을 희석시키는데 기여하였다. 환경기술론적 입장과 환경개량주의에 대항하는 입장으로 등장한 국내의 생태보수주의는, 환경위기의 원인을 개개인의 양심(쓰레기를 아무 데나 버리거나 자원을 쉽게 낭비하는 행태)에서 찾으려했고, 결국 그 책임이 소비자, 주부, 시민들에게만 떠맡겨졌다.

  이렇듯 국내에서의 환경, 생태운동은 환경위기의 원인들을 국부적으로 보거나 개량적으로 해결하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한 것이 사회생태론, 생태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생태론 등이다. 이들은 위기의 원인을 국가, 사회제도, 지배관계, 생산관계, 정치적 역학관계 등을 통해 분석하려고 하였고, 이에 대한 해결 역시 대안사회적 양태를 띠고 있었다. 국내에 잘 알려진 그린피스나 세계자연보호기금(WWF), 자연의 벗 등도 앞서 제기한 문제점들로 인해 그 한계가 노정되어 있다.

  이러한 크고 안정된 단체들의 단기적이고 개량적인 사업방식들을 비판하면서 대두된, 대안사회를 꿈꾸는 생태주의 단체들이 있다. ‘한 알의 씨앗(A SEED:Action for Solidarity, Equality, Environment and Development)’은 환경정의와 사회정의를 위해 활동하는 국제청년네트워크이다. 이 단체는 1992년 이래로 줄기차게 자본의 지구화 과정에서 기업에 의해 파괴되는 환경의 이슈들에 대해 캠페인, 직접행동 등의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는 1998년에 72개국 300여명의 활동가들이 모여 결성한 ‘PGA(People’s Global Action)’의 중추 연락망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환경문제 뿐만 아니라 남북문제, 반인종주의, 세계은행이나 국제통화기금, WTO 체제 등에 대한 근본적 비판운동 등도 전개하고 있다. 관료화를 방지하기 위해 대표체계를 없애고 각 주제별 담당자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환경이라는 이슈를 사회운동으로 통합해내는 논리와 실천방식들을 가지고 있다. 정의로운 남북관계, 지역자치적인 선택, 대안사회의 제시 등 진보적인 환경운동의 이정표를 담고 있으며, 환경문제가 전지구적·지역적 체제와 산업구조 개혁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는 거시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99 에코토피아 캠프와 대안사회

  이러한 흐름들은 국내에서도 학생, 청년층이나 진보 진영에 의해 이어지고 있다. 올해 여름 대학생들과 청년 단체들에 의해 이루어진 ’99 에코토피아 캠프는 다른 세계, 다른 질서, 다른 상상력을 원하는 총체적인 의미에서의 새로운 대안사회를 향한 첫 발걸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외에도 환경단체, 여성단체, 노동단체, 기타 시민단체들의 생태문제에 대한 관심과 참여는 환경문제의 해결이 일회적으로 또는 부분적인 해결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증명하고 있다.

  서구적인 의미의 생태주의가 소개된 지가 10년 남짓밖에 안 되었다고 보면, 인정과 수용을 위한 충분한 시간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미성숙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균열의 양상, 그리고 생태와 환경의 상품화, 기호화, 그리고 범람의 상황까지 벌어졌다고 한다면 분명 그 균열이나 대립은 건강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생태주의자임을 자청하거나 그들을 비판하는 개인이나 집단들의 근거와 목소리가 그다지 뚜렷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 사회에 생태주의를 둘러싼 논의지형이 성숙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아직은 요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든다. 색깔이 명확하지 않은 대립을 지양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언급하는 이론과 사상에 대한 올바른 동의 혹은 비판의 자세를 확립해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자세가 개량주의로 경도된 환경운동이나 소위 순수한 환경운동이라고 자칭하는 생태주의운동 등의 빈곤한 풍토로부터 벗어나, 21세기 생산적인 대안생태사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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