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기획] 동아시아 문화: ① 동아시아 문화와 국가정체성


 

최근 몇 년 사이에 동아시아 지역에서 영화, 드라마, 가요 등
한국 대중문화에 대한 선호 열풍이 불고 있다.  
한류문화 형성과 함께 한류 문화 산업은 성장하고 있는데
그로 인해 국가간의 문화경계는 허물어지고 국가정체성은 무너지고 있다.
따라서 이번 기획에서는 동아시아 문화와
국가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차례  ① 동아시아 문화와 국가정체성

                       ② 동아시아 문화 공동체

김신동/ 한림대학교 언론정보학부 교수


대만에서 한국 드라마 대장금이 시청률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홍콩에서도 대장금의 인기는 대단해서 대장금 사전도 나오고 책도 나오고 하는 모양이다. 재작년에 현장조사겸 인터뷰를 할 목적으로 홍콩에 갔었을 때는 전지현에 대해 열광하는 젊은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수 있었다. 겨울연가와 욘사마 바람에 대해서는 하도 들어서 지겨워질 정도이다. 중국과 일본, 베트남과 홍콩에 부는 한류의 소문은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고 기분을 들뜨게 하고 때로는 가슴마저 벅차게 한다. 한국의 대중문화상품들이 외국에서 인기를 더해간다는 소식에 가슴이 뭉클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중문화의 성장과 문화적 열등감



TV 오락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외국인들이 있다. 로버트 할리나 이다도시, 그리고 요즘 말이 많은 미즈노 순페이 등이다. 개인적으로 모두 훌륭한 사람들이지만 만약에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이 아니었다면 굳이 TV의 스타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다른 사람들이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가 선진국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들이 TV에 나와서 김치를 칭찬하고 한국인과 한국 사회의 미덕을 ‘인정’해 주면 모두가 가슴 뿌듯하고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와 다르고 우리보다 나은 나라에서 왔지만 우리를 알아주며 우리를 좋아함으로 인해 기꺼이 우리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 사람들의 약간 엉성한 한국말과 개그를 우리가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뭇 달라 보이는 두 가지 경우가 기실은 같은 뿌리에서 비롯되고 있는 현상이다. 그것은 ‘인정의 정치학 (politics of recognition)’ 혹은 ‘인정투쟁(struggle for recognition)’의 일부로 우리의 일상에 점착해 가고 있는 현상이다. 식민과 전쟁의 폐허에서 후진국의 ‘후진’ 삶을 고단하게 이어 온 한국인들은 지배자와 동경의 대상들로부터 인정을 획득하고자하는 탈식민주의의 내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마치 선생으로부터 칭찬을 갈망하는 학생의 심정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근대화와 경제발전, 민주화 등의 사회변동 과정을 거치며 물질적 성장과 정신적 빈곤 사이에 놓여진 긴장은 좀처럼 해갈의 추구를 찾지 못했다. 내 놓을 거 없는 후진 사회의 오명을 쓰고 늘 국제무대의 가장 자리에서 천덕꾸러기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해 누군들 즐거웠겠는가. 그러다가 현대차가 미주를 달리고 LG에어컨과 삼성 휴대폰이 중국의 창틀과 중국인의 손을 점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우리는 스스로의 자존과 자부심을 애써 북돋우며 문화 국민의 긍지를 가지고자 분투했다. 그렇지만 자동차와 휴대폰을 팔면서도 마음이 허전한 이유는 문화적으로 딸린다는 열등감 같은 것이 내면화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열등감을 위로해 주는 것이 바로 이다도시의 혀 짧은 유머 한 마디, ‘한국사람 굉장해요’ 인 것이다. 이 순간 이다도시는 평범한 아줌마가 아니고 세련된 서양 문화의 극치 프랑스를 대표하는 화신이며 그녀의 칭찬과 환호 속에서 인정받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이런 즐거움은 블랑카에서 느끼는 재미와는 다른 점이 있다. 박수홍 윤정수의 “아시아 아시아”에서 추구하는 희열과는 사뭇 달라 보인다. 그러나 사실 그 뿌리는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후진사회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휴머니즘으로 다가설 줄 아는 우리 한국인들은 세계인으로서 인정받을 위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TV를 뭉클한 느낌으로 보고 있는 순간 만큼은.


문화의 초국적 수용은 국가의 성립과 역사가 같다. 문화란 국가의 장벽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므로 철조망을 치든 지뢰를 심든 사람에서 사람으로 흐르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국가라고 부르고 경험하고 있는 사회적 고안물로서의 근대국가는 발생지인 서구에서도 한 두세기를 넘지 못하며, 우리나라의 경우는 한 세기도 되지 않은 체제이다. 문화에 국적을 부여하는 버릇은 국가가 형성되면서 이루어진 것인데 이것이 문화의 입장에서 보면 좋은 것인지 의심스럽다. 마치 작은 바가지로 큰 강물을 규정하려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문화의 공유와 국가정체성



사실 우리의 근대화를 살펴보면 끊임없는 서구 문화의 유입과 수용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제도, 경제제도, 교육체계, 그리고 이른바 ‘문화’라고 부르는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 어느 것 하나 서구에서 가져오고 배워오지 않은 것이 없다. 지속적으로 왕창 배워오고 베껴왔지만 국가 정체성이 흔들린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왜냐하면 문화의 공유와 국가의 정체성에는 아무런 필연적인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은 남과 북이 같은 민족, 같은 문화, 같은 언어 등을 지니면서도 다른 국가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자명하다. 오히려 한국은 후발 근대화 과정에서나마 적극적으로 선진 문화를 수용하고 변형하여 자신의 일부로 만들어 내기 위해 불철주야 노심초사 전력투구했기 때문에 이만큼 발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근래 한국의 대중문화가 외국에서 수용되는 현상에 대해 처음에는 스스로 놀라고 다음으로는 적극적으로 즐기는 이유는 서구나 일본의 것을 모방하는 것에만 익숙해져 왔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문화의 초국적 유통에 대해 익숙하지 않은 한국 사람들, 일본 것을 보거나 듣거나 좋아하면 ‘나쁜’ 것으로 길들여진 한국 사람들, 음반 가게에 가면 한국 음악과 서양 음악만 있는 것에 대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국 사람들은 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서양 것도 아닌 우리 음악 따위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좋기는 하지만 일본의 음반 가게를 들여다보면 한국 것만 아니라 전 세계 인류가 만들어서 파는 음반은 모두 있고 타이페이나 홍콩, 방콕이나 베이징의 거리에도 문화 상품의 다양성은 서울보다 현저하게 높다.


동북아의 대중문화가 문화의 원래 성격을 찾아 국경을 가로지르고 있다. 서구와 비서구로 이분화되어 일방적으로 유통되던 문화의 지형도가 바뀌고 있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서구의 변형이고 모방이고 해도 좋다. 어차피 모든 문화는 모든 문화의 변형이고 모방이고 잡종이니까. 이웃들이 우리 문화에 대한 빗장을 내던지고 담을 헐었다. 성숙한 그들은 굳이 문화에 국적을 묻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가. 당신은 태국이나 필리핀, 인도나 일본의 영화와 가요와 놀이에 관심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오늘 우리의 극장과 TV에서는 아시아의 어떤 문화가 소개되고 있는가. 아시아가 우리를 알아갈 때 우리는 아시아에 대해 계속 귀와 눈을 닫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문화에 국적이 존재하는가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