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감성 끌어매는 이미지의 뫼비우스띠

오창은 / 국어국문학 석사4차



대학원신문사는 지난 두 달에 걸쳐 문화비평을 공모하였다. 그 결과 응모작이 단 두 편에 불과해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또한 참여의 저조에 비례해 일정 수준에 오른 비평이 응모되지 않아 당선작을 뽑을 수 없었다.
‘문화’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중앙대의 경우에도 구체적 현실을 대상으로 한 연구 작업이 지난함을 보이고 있다는 점은 다소 예상 밖이었다. 아무쪼록 이번의 결과를 거울 삼아 현실에 뿌리 내리는 문화이론 공부가 진행되었으면 하는 바램 간절하다.
심사는 강내희 교수(영어영문학)가 담당했으며, 당선자가 없는 이유로 심사평은 게재하기 않기로 하였다. 이에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오창은씨의 글을 선정, 요약해서 싣는다.----------<편집자주>


요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좀더 유쾌한 표정을 지을 기회가 많다. TV, 신문, 잡지, 심지어는 도심 빌딩에 붙박혀 있는 대형 스크린을 통해 재미만점의 이동전화(셀룰러폰)와 개인휴대통신(PCS) 광고를 무의식적이고 자동화된 형태로 접하기 때문이다. 시선이 닿는 곳 귀가 열려 있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때로는 부드러운 손길로, 때로는 강렬한 몸짓으로 우리 모두에게 다가오는 것이 이들 휴대통신 광고다. 드라마보다 영화보다 더 흥미진진한 세자리 숫자들(011, 016, 017, 018, 019)의 전쟁은 ‘이미지에 거는 한판 승부’의 끊임없는 교차들로 이뤄져 있다. PCS 광고는 우리시대 감수성의 상징적 표현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단지 막대한 자본을 투자한 자본의 한판 축제의 장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한 시대의 정서와 숨겨진 욕망을 공략하는 공격적 행위들이기 때문이다. 억제된 욕망의 드러내기로서의 광고에 대한 접근은 현대인의 이중적 삶의 양태를 밝혀주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노동력을 사고 파는 실제 삶과 이미지를 교환하는 삶이라는 이중적 형태의 생활세계가 현대사회를 규정하고 있다. 이미지 속의 삶으로서의 ‘문화’는 현대인의 삶에 깊숙히 개입해 들어가면서 무의식적으로 삶에 개입하고 삶을 변화시키고 있다.

처음 갑작스럽게 “터질 것 같아!”라는 광고의 카피를 들었을 때 누구나 한 번쯤은 불온한 상상(?)을 해 보았을 것이다. 언어의 다차원적 해석 가능성을 염두에 둔 이러한 카피는 몇가지 풍경을 주위에 배치시킴으로써 ‘벗지 않고도 벗은 듯한 느낌’을 적절히 드러내 주고 있다. 인간의 3대 욕망을 흔히들 식욕, 수면욕, 성욕이라고 한다. 그런데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여기에 ‘소비욕’을 강렬한 힘으로 포함시키길 요구하고 있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욕망의 구조를 복잡하게 변형시키면서 상품 소비의 운신의 폭을 넓히는 것이 요즘 광고의 전략이기도 하다.

신현준과 고소영의 <소리가 보인다> 시리즈의 ‘샤워’편은 섹스어필의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 샤워하는 여성의 영상적 이미지와 소리가 주는 음향적 효과를 교묘히 중첩시키고 있다. 거기다 두 남성의 절묘한 표정배치는 하나의 영상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관음증이라는 엿보기가 주는 관능적 효과를 광고에 도입함으로써 이미지의 힘을 배가시킨 것이다. 실제의 현실세계에서는 은밀한 골방의 포르노 테이프와 인터넷 상의 성인 사이트에서만 가능하던 훔쳐보기라는 관음증이 간단히 대중매체의 공간으로 치고 나오는 것을 목격한다. 결국 감정의 흐름도, 내면의 세계도, 그리고 은밀한 사생활도 투시의 대상이 될 때 광고는 성공할 수 있다. 거기에 욕망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자본주의의 전차가 힘찬 몸짓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뜨는 광고중의 하나인 <아저씨 짜장면 시키셨죠>는 다른 차원의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유쾌한 공상을 현실로 변형시켜 버리면서 공상에 비상의 날개를 달아주는 형식파괴를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영상매체의 최대의 장점 중의 하나는 공상적 세계를 현실에 희화적으로 치환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도 일상적인 철가방이라는 현실과 지하철 혹은 비행기 안에서의 짜장면 주문이 만난다는 그 상황설정 자체가 낯설기만 하다. 여기다가 “아니 짬뽕”이라는 대답이나 “그릇 찾아와야 된다”는 너무도 가벼운 대꾸들은 무거운 것을 전혀 무겁게 인식하지 않는 우리 시대의 정서를 반영하고 있다. 너무도 버거운 일상속에서 때로는 너무도 낙관적인 유머를 상상하는 것, 거기에 현대인의 한 일상탈피의 방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너무도 구체적인 현실과 너무도 비현실적인 공상의 가벼운 악수 나누기는 이미지의 세계가 또다른 이미지의 세계를 생산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까지 광고는 상품과 소비자를 연결해주는 도구 역할을 해 왔다. 그런데 이제 광고는 가상세계와 실재세계를 연결해주는 도구로 상품을 설정하고 이러한 플롯을 모두 감싸는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시각으로 해석하자면 광고가 상품미학의 한 이데올로기로서 자신의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한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란한 세자리 숫자들의 전쟁속에서 가장 후한 점수를 획득한 것은 ‘가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한 잔잔한 PCS광고였다. 역시 우리 시대의 감수성은 조금은 보수적인 측면에서 가장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구체적인 현실에 기반할 때, 그리고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이 소중하다고 인식하는 것의 가치를 다시 확인시켜 줄 때 가장 대중적인 광고가 탄생함을 본다. 그러면서도 이 광고는 낮고 절제된 목소리로 시청자들과 대화하려고 한다. 상품광고같지 않은 광고, 기업이미지 광고 같지 않은 광고가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이미연과 김승우가 나오는 이 광고는 강렬한 비트의 음악도 현란한 색상도 없다. 대신 부드럽고 포근한 가족적 이미지가 강조되고 있다.

이는 물론 지금 한국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대량실직 해고사태와 밀접히 연관돼 있다고 본다. 가족의 생존권이 어떤 식으로 갑자기 위협받을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안정된 남편과 부인, 아이가 보여주는 삶의 견고함은 ‘이상적 가족상’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최소한의 자신의 근거지인 가족을 수호하고자 우리 시대의 욕망을 너무도 잔잔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성적 욕망의 표현도 아니고, 보다 강렬한 이미지에 대한 열망도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이 파괴한 것에 대해 자본이 다시 보여주는 이미지 속에서 우리 시대 비애에 찬, 안정된 삶의 욕망이 투영된 것이다.

이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대중문화나 광고를 분석하는 행위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자본에 대한 짝패(count-partner)로서 개별주체들이 의무감을 가지고 저항해야 하기 때문인가.

자본의 힘이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가에 대해 지력을 소비해가며 분석해내고 대항하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저항의 몸짓이 근엄해야만 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광기와 연결돼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보다 유쾌하게 자본의 힘과 대화하면서도 성찰적 저항은 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한 딴죽걸기가 자본주의가 전일화된 우리 시대의 유쾌한 저항의 방식일 수도 있다. 광고의 최종목적은 상품의 소비를 겨냥하고 있지만 그것은 무의식중에 보다 큰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담지하고 있다. 대중적으로 성공한 광고는 모두의 욕망을 가장 잘 반영한 것이고, 그 욕망은 도덕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제어당하면서 긴장감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끊임없는 이미지의 반복속에서 자본주의 생활양식에 익숙하게 길들여진 주체들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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