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 ‘탈근대 인식론과 생태학적 상상력’(정정호/한신문화사 刊,1997)

 

편집위원회



한국에서 ‘이론’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함일까? 그것도 서구이론을 수입하여 토착화시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걸까? 정정호 교수(영문학)는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글을 ‘짜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론의 시대니, 이론은 죽었느니 하는 세론(世論)에 별다른 흔들림이 보이지 않는 것도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뿌리박음이 그만큼 깊기 때문일 게다. 그런 그가 대중들에게 말을 걸기 위해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이 보따리는 그동안 자신이 해온 이론적 작업과 현실에서의 대안을 탐색하는 성찰의 과정을 담고 있다. 앞뒤가 꽉 짜여진 틀을 지닌 ‘맞춤의 글’이 아니다. 입담 좋은 이야기꾼이 자신의 경험을 많은 ‘에드립(ad lib)’을 넣어 풀어놓는다. “어떠한 독창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아마추어가 되는 용기를 지니는 것이 필요하다”는 W. 스티븐스의 말처럼, 그것은 어쩌면 아마추어가 되고자 하는 저자의 속내를 드러내는 건지도 모른다. ‘탈근대 인식론과 생태학적 상상력’이라는 이 책의 제목은 전체의 주제를 나타내기도 하는데 여기에는 부연 설명이 필요하다. 여기서 ‘탈’이라는 말은 한자인 ‘脫’에서 왔는데, 저자는 여기서 ‘탈’을 단순히 벗어난다의 의미로 보지 말 것을 요구한다. 순수한 우리말로 할 때의 가면을 뜻하는 ‘탈’과 사고를 낸다라는 의미의 ‘탈’이라는 두 개념을 모두 끌어들여, 그 효과로서 ‘탈’은 나쁜 근대성을 ‘탈’ 내어 좋은 근대성으로 회복시키고, 근대성의 나쁜 면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하는 ‘탈’을 씌우겠다는 저자의 의도적인 접두어가 되는 셈이다. 이제 탈근대적 인식론은 생태학적 상상력과의 동일시를 꾀한다. 이는 곧 “서구 근대성의 가장 큰 병폐가 ‘생태학적 상상력’의 결여에서 기인한 것으로 인식”하며, “탈근대적 실천은 모든 분야에서의 생태학적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저자가 보기에 탈근대성의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섞음’과 ‘퍼뜨림’이고, 이 개념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미학’의 차원을 넘어선 ‘정치학’의 문제이다. 저자는 이론을 ‘행동하는 실천전략’으로 보면서, 모든 권력이나 이권과의 공모관계까지도 문제삼는 전위적인 위반자가 돼야 한다고 역설하는데, 그렇다면 저자의 실천은 이제 ‘전위적인 위반자’, 즉 아방가르디스트가 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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