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과 저항 사이로 질주하는 아이들

양재영 / 서울대 인류학 박사과정



80년대 후반 포스트모더니즘 논쟁과 함께 불거진 문화 논의들은, 이론적 미숙을 드러냈던 대중매체 중심의 텍스트 분석을 거쳐, 이제 좀 더 실증적인 분석을 통해 서구의 이론을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문화의 일상성에 주목하고 문화적 실천의 주체들에 애정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기층에 너저분하게 널려있는 '하위문화'의 주변적 지위와 저항적 가능성에 대한 최근의 관심과 사례연구는 문화연구의 새로운 대안으로 각광받고 있다.



50-60년대 미국의 범죄사회학 연구에서 시작된 하위문화, 특히 청소년 하위문화에 대한 연구는, 60년대 이후 대서양 건너 영국 버밍엄의 '현대문화연구센터 CCCS: Centre for Contemporary Cultural Studies'에서 꽃을 피웠다. 알뛰세의 이데올로기론과 그람시의 헤게모니, 그리고 문화주의의 전통을 결합한 이 센터의 연구자들은 탄탄한 이론을 바탕으로 2차 대전이후 망가진 영국을 휘젓고 다니던 다양한 부류의 노동계급과 빈민층 청소년들을 발벗고 쫓아다녔다. 소위 하위문화에 대한 '민족지적 연구(ethnographic study)'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스킨헤드와 펑크에서 테디보이와 모드에 이르는 거리의 아이들은 자신들만의 공유된 스타일과 태도, 여가와 라이프스타일을 통해 다양한 저항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방식은 항상 기존의 체계에 대한 안티테제였다. 동시에 그 방식이 반동, 진보, 심지어 은폐에 이르는 다양한 스펙트럼 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저항성'이라는 단어로 묶일 수 있었다.

이제, 한국사회에서 하위문화와 그 반문화적 가능성은 건강한 문화운동의 복원을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까지 떠오르고 있다. 또한 한국의 청(소)년 하위문화가 과연 진정한 저항성을 확보하고 있는가 아니면 단순한 스타일의 모방일 뿐인가 하는 문제는 현재 첨예의 관심사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에 앞서, 먼저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하위문화라는 것이 과연 그 자체로서 하위문화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에 일단 의문을 가져야 한다. 사실 하위문화적 정체성과 스타일은 연구되지도 않은 채 파편적으로 존재하는 주변부적 존재들을 일방적으로 하위문화집단으로 설정하여 그들의 가능성을 타진한다는 것은 허공을 가르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검증되지도 않은 하위문화집단들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난도질하기에 앞서, 주변부적 지위에 놓여있는 다양한 청년집단들에 대한 보다 실제적인 접근을 통해 그들의 반문화적 성격과 그 긍정적 가능성을 찾아내고, 이후에 하위문화를 타진하는 것이 순리라 생각한다.


팬덤과 폭주족

2년전에 홍콩 스타의 한 팬클럽을 1년여동안 쫓아다닌 적이 있다. 그리고 최근에는 폭주족 남자애들을 수개월간 따라다녔다. 소위 민족지적인 작업을 위해 팬클럽에 입단하여 400여 낭자의 소굴에서 휘젓고 다녔고, 갈짓자로 날아 다니는 오토바이 뒤에 죽을 힘을 다해 매달려 영동대로를 넘나들기도 하였다. 그들이 기성제도와 체계에 대해 어떤 식으로 맞서 싸우는지, 혹은 그들이 얼마나 한심하게 그들의 젊음을 날려버리고 있는지가 궁금해서라기 보다, 그들이 '왜' 스타에 매달리고 목숨을 건 질주를 하는 지가 우선 알고 싶었다. 그들의 의도도 모르는채 겉모습만 재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10대 중반에서 20대 초반에 이르는 청년집단 내에서 대중문화는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스타를 중심으로 구축된 팬덤(fandome)은 별다른 여가수단을 구하기 어려운 10대 소녀집단들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가공할 위력을 지니고 있다. 특히 팬클럽은 보다 적극적인 형태로 스타에게 접근할 수 있는 매력적인 수단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팬클럽 회원들을 맹목적으로 스타에 빠져들어 아무 생각없이 방송국만 쫓아 다니는 한심한 여자애들로 속단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일반 청소년들에 비해 보다 적극적으로 대중문화를 수용함으로써 팬클럽을 학교교육과 제도에서 벗어난 여가활용의 공간으로 유용하게 활용하며, 자신들만의 공유된 스타일을 통해 유대감을 만들고 심지어는 스타이미지를 넘어선 집단정체성까지 과시한다. 대중문화 텍스트가 이들 팬클럽이라는 수용자를 통해 새롭게 창조적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그들은 기존의 '침실문화(bedroom culture)'로 표현되던 수동적이고 개별적인 대중문화 수용집단으로서의 소녀집단 이미지를 거부한다. 말하자면 제도교육과 지배적 가치에서 만족될 수 없는 욕구를 성취하기 위해 대중문화를 효과적이고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오빠부대보다 더욱 우려섞인 목소리로 질타되는 폭주족 아이들은 어떤가? 진학과 돈벌이라는 막연한 미래가 어깨와 머리를 짓누르는 현실 속에서 우리의 고삐리, 재수생, 주유소와 분식점에서 일하는 아이들에게 일과시간이 지난 후의 새벽 밤거리는 유일한 해방구다. 팬클럽의 아이들이 칠흙같은 소극장에 꽉꽉 들어가 그들의 우상이 출연하는 뮤직비디오 속에서 황홀감과 동일시의 쾌감을 맛본다면, 이들 폭주족 아이들은 밤하늘의 찬공기를 맞으며 죽어라고 대로를 달리는 게 현실의 고통과 미래의 불안을 잊고 육체적 희열을 맞볼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인 것이다. 오토바이를 타고서 새벽의 여의도와 영동대로에서 조우하는 익명의 아이들은 어느새 스피드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서로를 느끼고 지배적 가치로부터 반발하고 일탈할 수 있는 든든한 동지애를 맛보게 된다.

사실 서구적인 의미의 하위문화 개념을 들이밀자면, 우리의 팬클럽 소녀들과 폭주족 소년들을 각기 하나의 하위문화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뮤직비디오를 같이 보는 순간을 제외하면 팬클럽의 아이들은 스타일이나 사회적, 경제적 배경, 사회와 기존질서에 대한 태도에 있어 너무도 개별적이기 때문이다. 폭주족 아이들은 말할 것도 없다. 기껏해야 5-6명의 또래집단일 뿐, 대로에서 오토바이를 탄채 합류했다가 헤어지는 익명의 만남들이 그들이 결집되는 유일한 순간이다.


하위문화 연구 거꾸로 세우기

억지로 청(소)년 문화를 집단정체성 혹은 동지의식과 결부시킬 수는 없다. 당연히 그들의 문화가 왜 저항성과 전투력을 확보하지 못 하고 있는가를 한탄할 필요도 전혀 없다. 오히려 이들을 파편적이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현재의 거대 문화산업의 논리와 지배적인 제도, 가치의 본질을 그들이 얼마나 간파하고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가 핵심적인 문제이다.

가령 폭주족 아이들의 경우 거치른 남성성과 폭력을 '일탈'이라는 도발적인 형식과 결합함으로써 기존의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갈구한다. 하지만 대안없는 회피라는 혐의로부터 벗어나기는 어렵다. 반면 팬클럽은 실제적인 투쟁과는 거리가 멀지만 지배적 제도와 가치에 대한 상징적 저항의 가능성을 늘 확보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스타시스템과 문화산업의 논리에 흡수될 수 밖에 없다는 한계가 있지만. 폭주족 아이들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자신들만의 대안을 제시하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사회의 다양한 청(소)년집단을 몇덩어리로 묶어서 그들의 성격을 규정하거나 저항성이라는 기준을 잣대로 가치판단을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다양한 스펙트럼상에 존재하는 청(소)년집단과 그들의 문화가 기존의 가치체계와 질서, 문화적 규칙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대응하는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다. 왜냐하면 직접적인 투쟁 뿐 아니라 상징적 저항과 일탈, 심지어 체체순응까지도 문화적 실천과 대안의 가능성을 제시하기 위한 디딤돌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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