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은/중앙대 인문과학 연구소 전임연구원

  92, 93년 즈음, 젊은 대학원생·연구자 사이에 이런 소문이 떠돌곤 했다. “강북에는 문예아카데미가 생겨 종로를 거니는 맛이 있고, 한강 이남에는 중앙대 대학원 기획특강이 있어 84번(지금의 151번)을 타게 된다.”
  90년대 초반에 중앙대 대학원의 학술운동 역량은 대단했다. 그래서 대학원 총학생회의 탄탄한 조직력과 학술연구협의회의 연구역량이 결합해 한국사회의 현안을 다루는 심포지엄·토론회·기획특강이 대학원 5층 국제회의실에서 수시로 개최되곤 했다. ‘대학원 운동론’, ‘우리 시대 문화운동의 새단계’, ‘인간과 진보, 그리고 생태위기’, ‘문화실천의 새로운 전화를 위하여’, ‘우리와 서구의 근현대 사상’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그 중 최대의 히트작은 ‘우리와 서구 근현대 사상 - 근대와 탈근대의 인식론적 관젼이었고, 93년 12월 28일부터 94년 2월 28일까지 3개월에 걸쳐 14개 강좌로 진행됐다. 이 3개월 동안 대학원 5층 국제회의실 좌석은 물론 통로까지 입추의 여지 없이 수강생들이 들어차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이 기획강좌는 ‘대학원생의 기초학습 역량 강화’라는 목적에 따라 근대이성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는 칸트·헤겔·데카르트·베버에 대한 강좌가 기획되었고, 현대 포스트 담론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 당시에는 생소했던 서구이론가 하버마스·데리다·료따르·보드리야르 등에 대한 강의가 진행되었다. 93년의 상황에서는 보드리야르 등과 같은 사상가를 논한다는 것은 최첨단을 달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체 강좌 수강료가 5만원이고, 개별 강좌 수강료는 5천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강인원의 최대한도를 넘기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소문에 의하면 자치기구의 특성상 수익이 발생해서는 안되는데도 당시 상당한 액수의 수익금이 발생해 대학에 지정기탁금형식으로 발전기금을 납부했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학술기획 특강의 성공신화는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서구의 최첨단 사상을 당시의 명망있는 신진 지식인들(김창호·양운덕·도정일·이정우·윤평중·조광제·박성수 등)이 강의했기에 일반인들의 관심이 대단히 높았다. 다음으로 일간 신문에 광고를 내고, 각 대학에 학생회 간부들이 직접 뛰어 다니는 등 적극적인 홍보가 주요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철저한 사전 기획이었다. 이 기획특강을 위해 두 달 동안 1주일에 두 번씩 4명의 기획위원이 집중적으로 준비했다. 당시 기획위원들은 특강이 끝난 다음 체력적·정신적 피로로 인해 큰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고 한다. 학술 특강 ‘대박 신화’는 그냥 운이 좋아 얻게 된 것이 아니라, 철저한 사전 준비를 통해 만들어낸 기획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당시 중대신문은 ‘우리와 서구 근·현대 사상’에 대한 평가 기사에서 “대학의 위상을 한층 높였다”고 극찬했다. 대학원 자치기구의 활동이 경우에 따라서는 대학원 학술역량 강화, 일반인을 위한 대중교양, 그리고 학교의 위상강화에까지 도움을 주는 효과를 발휘할 수도 있다. 조만간 다시 한번 학술기획 특강의 ‘대박신화’가 재현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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