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수/ 경제학과 강사

  92년 이전에는 지금과 같은 일반대학원 전용공간이 없었고 대부분의 대학원 수업은 지금의 중앙도서관 3층 개가식 열람실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물론 대학원이 중앙도서관 3층을 다 차지했던 것은 아니며, 중앙도서관 3층의 ‘ㅁ’자형 구조를 묘하게 구분하여 그곳을 대학원 열람실과 학부 교양과목 강의실로 나누어 썼던 것이다.
  그 당시 중앙대의 공간사정상 전체 대학차원에서 부족한 공간이었던 대학원 강의실, 교양과목 강의실, 시청각실 등을 애꿋게 중앙도서관 3층에 몰아서 집어넣었던 것이다. 아마도 중앙도서관은 특정 단과대의 배타적인 공간개념이 아닌 전체 대학의 공유개념이라는 발상이 첫 번째 이유이고 둘째는 대학원을 단과대처럼 대학의 실질주체가 아닌 학부의 부속물쯤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독립된 공간을 배정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애초부터 대학원 강의 공간 이외의 세미나공간이나 연구실 공간은 중앙도서관 3층에서 기대하기가 어려웠다. 중앙대 전체의 강의실, 연구공간의 결핍이라는 부분과 대학의 연구주체로서 당당하게 대접받지 못하고 객체로써 전락했던 것이 대학원이라는 그 당시의 모순으로 중첩된 것이다. 결국에는 냉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는 중앙도서관 3층에 학부학생들과 부대껴 가며 당시에 모순된 한국사회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려는 연구를 우리의 선배 대학원생들이 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당시 중앙도서관 3층 대학원 강의실은 결핍의 공간이자 모순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핍과 모순이 있는 곳에는 저항이 있는 법. 88년 하반기에 지금의 대학원 총학생회의 전신인 대학원 비상과대표자협의회가 총장실을 점거하면서 일반대학원 전용공간의 요구와 대학발전 마스터플랜에 대학원 발전안을 요구하면서 결핍과 모순에 대한 저항이 시작되었다. 비단 대학원 뿐만 아니라 정경대, 약대를 비롯한 대부분의 단과대가 겪고 있던 당시의 공간부족문제라는 결핍은 제 주체들의 결핍과 모순에 대한 저항을 통해 부분적으로 해결되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정경대를 공동 사용했던 경영대가 부족하지만 경영대 단독건물을 갖게 되었고 의대와 약대가 메디컬 캠퍼스를 요구하여 병원을 짓게 했다. 대학원도 그러한 투쟁의 결과, 요구안들이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져서 일반대학원 공간을 확보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대학원 공간의 확보도 불완전한 것이었다.
 
  지금의 대학원 건물에서 대학원생들이 대학원 수업을 하기 시작한 것은 92년부터이다. 초기에 건물 그 자체도 일반대학원 전용건물이 아니어서 각종 특수대학원이 1층과 3층에 들어섰고 심지어 지하 3층에는 학군단 강의실까지 들어서 있었다. 실질적으로 대학원의 수업이 이루어지거나 세미나를 진행할 수 있고, 연구를 할 수 있는 공간은 지하1층, 4층, 5층 일부만이 전부였다. 부족하지만 도서관 3층을 전전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분명한 것은 지금의 일반대학원 건물은 결핍과 모순에 대한 저항의 산물이다. 그리고 연구중심대학의 주체로써 자리매김하기 위한 저항들은 여전히 유효하며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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