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경계


이상하 / 경상국립대 교육연구원

최근 영화화된 영국 만화 <지옥전파자(Hellblazer)>에 반영된 인간세상은 샌드위치를 떠오르게 한다. 샌드위치의 상부가 신(神)이라면, 하부는 악마 루시퍼다. 그 사이에 샌드위치의 샐러드처럼 낀 존재가 인간이다. 체세포핵치환법(SCNT)에 의한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둘러싼 최근 사태를 보면, 또 하나의 이빨을 가진 샌드위치가 떠오른다. 이 샌드위치의 상부는 정부의 어설픈 경제논리와 일부 과학자의 선동이 결합한 것이며, 하부는 자신의 이념과 상반되는 것을 병적으로만 진단하는 일부 종교 세력과 과학에 대한 인문학적 제어론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과학은 이 샌드위치의 상부와 하부에 끼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샐러드와 같다. 왜곡되고 부족한 정보속에 사람들은 자기 입맛에 맞추어 과학의 환상을 만들어내고 죽이는 언론매체와 함께 춤을 춘다. 샐러드에 낀 다수의 과학자들은 뒤에서 투정을 부리지만, 무차별적인 양적 팽창만 전부인 줄 아는 국가의 주먹구구식 거대과학의 노예가 된 그들은 걱정만 한다. 샌드위치에 낀 ‘샐러드 과학’의 이 기구한 운명이 탄생한 원인을 과학과 타 분야의 관계를 가지고 함께 따져보자.

과학의 자율성과 이분법 신화
과학 발달의 실제 역사는 분과 다양성의 축적 과정이다. 과학의 분과 다양성 때문에 과학자들 사이에 의사소통도 그리 원만한 것은 아니다. 과학의 개별 분과는 그 나름대로의 고유한 역사적 형성 경로를 갖는다. 과학의 개별 분과들은 역사 속에서 성장하며 서로 결합하는 가운데 새로운 분과를 탄생시킨다. 이런 과정속에서 과학은 타 분야와 상호작용을 한다. 타 분야와 단절된 채 닫힌 체계로서 스스로 존재하는 과학의 분과는 없다. 하지만 지난 세기 우리에게 알려진 과학의 모습은 실제 과학의 모습과 다르다. 그것은 과학에만 고유한 과학적 합리성, 형식적 구조 혹은 역사에 중립적인 과학 발달의 보편적 구조의 모습으로 알려졌다. 그러한 모습은 넓은 의미에서 ‘과학적 자율성’(scientific autonomy)으로 불린다.

과학적 자율성 개념은 ‘영역 분할’의 신화를 낳았다. 확실한 지식체계의 이상형으로 추앙된 과학은 학문적 권위를 누렸고, 타 분야의 학문도 과학적 지식체계를 모방하였다. 그 지식체계는 실제 역사 속에 살아 기능하는 과학이 아니라 천사에 대한 인간의 동경이 만들어낸 이상화 된 지식체계일 뿐이다. 여러 학문 분야가 이상화된 과학적 지식체계를 모방하니, 과학과 타 분야의 경계는 영역 분할의 신화로 나타났다. 과학은 사실을 다루고, 윤리학은 가치를 다루며, 종교는 신앙을 다룬다. 영역 분할의 신화는 고대와 중세 서양사상에서는 이질적이었던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을 낳았다. 이러한 이분법은 암암리에 정치적으로 제도화되었고, 갈등의 불씨가 되었다.

19세기 중엽이 지나 도구의 발달과 함께 과학과 기술의 끈끈한 결합이 이루어졌다. 각 대학에 실험실이 갖춰지면서 밤하늘과 환경의 관찰은 도구의 조작속에 모형화되었다. 과학의 가치중립성이라는 애매한 규정 아래 과학은 사회진보의 수단으로 파악되었다. 과학은 생활세계를 편리하게 만드는 수단이지, 결코 생활세계의 가치체계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않는다고 여겨졌다. 20세기에 들어 기술과 결합한 과학이 문명에 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인식되면서, 과학은 문명의 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그러나 과학과 타 분야의 갈등에 대한 진짜 원인은 다른 데 있다. 영역 분할의 신화가 과학의 발달과 함께 깨진 것이다. 과학이 사실만 다뤄야 한다고 할 때 과학은 생명 현상을 조작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또 과학의 발전은 생활세계의 패턴뿐만 아니라 가치체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성전환 수술이 가능해진 상황은 남녀의 사회적 지위 및 결혼제도 자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요청한다. 영역 분할의 신화가 깨질 때 과학 또한 단지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것일 뿐이라는 주장도 득세했다. 자연과 문화의 이분법을 전제한 이 주장은 과거에 대한 일종의 극단적 반발이다.

과학이 다뤄야 할 문제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사실과 가치는 서로 절단된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 속에서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 그렇다면 과학과 타 분야 사이에는 아무런 경계가 없는 것일까.이 짧은 글에서 이 물음에 대한 단서는 인간 배아줄기세포연구를 둘러싼 혼란 속에서 발견된다. 황우석 교수의 신드롬을 만든 방송사가 이제와서 그를 공격하는 데 사람들은 매우 못마땅해 한다. 방송사의 취재방식 자체에도 문제가 있다. 과학계는 실험진위 여부 주체가 방송사라는 데 불만이다. 주의깊은 사람은 TV에 등장하는 어설픈 유명 과학자들이 아니라 다수 현장 과학자들이 황 교수의 행동을 거북해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이언스에 누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제3기관에 의한 실험 진위 여부에 응할 수 없다는 그의 태도는 국내외 과학자들에게 호감을 얻을 수 없다. 제아무리 과학의 자율성이 허구일지라도 역사 속에서 굳어진 과학의 미덕이 있다. 과학자의 행위는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 가설의 연결성이라는 ‘과학적 생활양식’에 의해 제한된다. 과학자에게는 국경이 있다. 과학을 둘러싼 국가 간에 경쟁도 있다. 하지만 역사 속에 굳어진 과학적 생활양식을 깨거나 회피하는 자는 과학자로서 다른 과학자의 신뢰를 얻을 수 없다.

과학, 언론과 정부사이에서
재확인 및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과 가설의 연결성이라는 과학적 생활양식은 과학자 집단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만 깊게 연구된 적이 없다. 가설과 측정량의 연결에 어떤 형식적 구조가 있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과학사는 그러한 연결 자체가 역사적 과정임을 시사한다. 어떤 경우에는 재확인 혹은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 없이 가설이 세워졌다가 추후에 그러한 측정량과 연결된다. 또 어떤 경우에는 재생산 가능한 측정량만 다음 세대로 대물림되어 엄밀한 가설과 연결되기도 한다. 체세포핵치환법에 의한 현재 인간 배아줄기세포연구는 실험이 재현 가능성의 확률을 알려주는 엄밀한 가설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만큼 그 연구는 초기 단계이며, 연구성과는 황 교수 연구팀이 보유한 기술력과 여러 다른 과학 분과의 결합에 좌우된다.

배아줄기세포를 얻는 방법이 여러가지이듯이, 각각의 연구에서 기대할 수 있는 효용 또한 다르다. 현재 과학기술의 수준에서 황 교수팀의 연구는 장기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성격을 갖는다. 만능줄기세포 분화 과정에서 발생 중 질병의 원인을 추적할 수 있다. 황 교수팀의 기술과 다른 기초 과학 분과의 합성 속에서 이뤄지는 장기간의 연구 결과는 그 누구도 현 시점에서 예측할 수 없지만, 이것이 연구의 반대 근거는 될 수 없다. 그러나 현재 난치병 치료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치는 위험수위에 도달했다. 여기에는 과학자 이전에 사회 구성원으로서 황 교수의 책임이 크다. 그는 4단계 난치병 치료 비밀을 강조함으로써 비밀교의 교주가 되었고 비밀의 베일이 벗겨지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난치병 치료에 대한 기대감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또 그는 하나의 민족을 강조함으로써 과학이 민족주의의 이념이 되는 데 기여 했다. 그는 과학자를 국가를 위한 일벌레로 전락시켜 근면성실이 과학적 발견의 원천이라는 그릇된 과학관을 퍼트렸다. 결국 과학의 발전이 강한 민족을 만들 것이라는 생각이 퍼져 황 교수의 비판자는 빨갱이 혹은 매국노로 낙인찍히는 세태가 도래했다.

그러나 과학의 발견과 그것을 재화로 만드는 것은 다르다. 또 그렇게 얻어진 재화를 사회에 골고루 분배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황 교수는 과학자로서 과학적 생활양식을 어겼다. 정부는 과학을 그저 경제 발전의 수단으로 본다. 소수 유명인의 자문에 의한 과학정책은 우리의 현재 경제규모에 걸맞지 않다. 특정 과학기술의 실질적인 효용성과 위험성을 사전에 측정하여 시민에게 제대로 알리는 정치권력과 독립된 기술결과측정기관은 단 한 곳도 없다. 정부는 과학자를 사회 문제 해결의 능동적 참가자가 아닌 일꾼으로 본다. 이것은 과거 영역 분할 신화 속에서 과학을 목적 달성의 단순한 수단으로 본 것과 다르지 않다.

언론은 과학을 마치 대중 가요의 경연장으로 여긴다. 과학기자들은 국외 보도에서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내어 스타 만들기에 급급했다. 그들은 스타를 만들고, 문제가 터지면 자신들의 손으로 스타를 죽인다. 그들은 프랑스가 어떻게 분자생물학 후진국에서 다시 부활했는지 모른다. 측정량에 제한된 과학적 생활양식 속에서 과학자의 사고는 자유롭다. 사고의 자유가 제한된 과학자는 시체이며, 프랑스는 이 점을 알고 있었다. 진정으로 이 나라 과학의 발전을 원하는 기자가 있다면, 국내 실험실 문화부터 취재하라. 이 나라 대다수 과학자들은 정치 권력의 노예들이다. 인문학자들은 여전히 가치문제가 자신들의 고유 영역이라고 여긴다.

과학은 사실을 다루고, 윤리학은 가치를 다룬다는 식의 영역 분할의 신화는 유지될 수 없다. 각 직업군은 역사 속에서 굳어진 나름대로의 생활양식을 갖고 있다. 사회의 문제는 여러 이질적인 지식의 상호작용을 요구하며, 문제해결의 선결 조건은 서로의 생활양식을 존중하는 것이다. 과학자가 어설프게 종교인이나 정치인 행세를 해서는 안 되며 과학기자가 과학의 발견은 제대로 알리지 못한 채 스타 과학자 만들기와 죽이기의 게임을 진행해서는 안 된다. 문제해결에서 과학과 타 분야의 갈등이 발생할 때 중재와 제도 개선을 회피하는 정부는 더 이상 국가권력 기관의 자격을 가질 수 없다. 인간 배아줄기세포연구를 둘러싼 혼란 속에 반영된 우리의 과학은 초반부에 명시한 ‘샌드위치에 낀 샐러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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