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호를 맞아 본지는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이수영 연구원의 사회로  해석학자 펠릭스 가타리와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모시고, 성과 욕망의 경계에 대한  견해를 들어봤다. 가상대화에 기꺼이 참여해준 두 스타학자와 이수영 연구원께 심심한 감사의 말을 전한다. ‘뒷풀이’는 하지 않았다. <편집자주>


이수영 / 연구공간 수유+너머 연구원

사회자: 오늘은 인간의 성(性)을 주제로 두 분의 위대한 철학자를 모시고 말씀을 나눠보려 합니다. 모두들 알고 있다시피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발견과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유명한 분이고, 펠릭스 가타리는 68혁명 이후 대중의 다양한 욕망형식에 주목하여 욕망의 미시정치문제를 제기한 실천적 운동가로 유명한 분입니다. 두 분 모두 인간의 성(性)과 욕망에 관해 치밀한 연구와 실천적 활동을 해오신 점에서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가타리 선생님이 프로이트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는 점에서 차이점도 명확한 것 같습니다. 가타리 선생님은 프로이트주의의 어떤 점이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먼저 묻고 싶습니다.

가타리(이하 가): 한마디로 하자면 프로이트주의는 근본적으로 보수적입니다. 특히 초자아라는개념을 보면 이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욕망이 있는데 이것이 발산되면 안 되니 억압해야 하고, 만일 이 억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정신병으로 가거나 사회가 파괴된다고 하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억압을 내면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내면화된 억압이 바로 초자아라는 현상이고 이는 사회의 억압을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기능합니다.

사회자: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관련된 이야기 같은데 여기에 대해서 프로이트 선생님께서 자세하게 설명해주시면 좋겠네요.

프로이트(이하 프): 남자 아이의 욕망은 어머니와 일체가 되고 싶은 욕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근친상간금기의 위반이므로, 거세공포라는 방식으로 억압기제가 작동합니다. 이 과정을 제대로 극복하지 못할 때 인간은 신경증 증세를 일으키게 됩니다. 히스테리가 이 거세공포로 인한 불안을 신체적인 증상으로 전환시킨 것이라면, 공포증은 동물이나 사물 등으로 이 불안이 투사된 경우입니다.

: 거세공포라는 말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프로이트주의는 또한 남근중심적이기도 합니다. 남자는 여자처럼 남근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아버지라는 권위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남근이 ‘결핍’되어 있는 존재가 여성이라면, 남성은 남근이라는 ‘잉여’를 가지고 있는 셈이지요. 얼마나 남근(남성)중심주의적인 이론입니까?

사회자: 어머니와 일체가 되고자 하는 욕망이 애초부터 달성될 수 없다면 인간의 욕망은 항상 결핍될 수밖에 없는 것이겠군요?

프: 예, 그렇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불만족의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인간은 차라리 불만족을 욕망한다고도 할 수 있겠죠. 그렇지만 충족되지 못한 욕망이라고 할지라도 예술적이고 과학적인 고상한 작업에 쓰일 수 있도록 적절히 승화된다면 이것 또한 인류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는 것입니다.

가: 인간의 욕망은 결핍을 모릅니다. 오히려 욕망은 끊임없이 생산합니다. 공장의 배치를 보십시오. 기계와 인간이 가장 생산적인 방식으로 결합되어 있는 배치이지만, 이 배치는 무엇 때문입니까? 바로 뭔가를 생산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욕망은 그처럼 뭔가를 생산하는 능동적인 흐름이지 결핍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런 욕망을 프로이트는 단순히 성적인 것으로만 환원해버렸던 것입니다. 욕망은 성욕만 있는 게 아니며 모든 욕망이 성욕의 억압적 형태나 전환된 형태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프: 이런 사례는 어떨까요? 도스토예프스키의 과거를 보면 그가 간질을 앓았으며 자살충동을 자주 느꼈던 것으로 나옵니다. 또한 소설에서도 아버지 살해라는 모티프가 자주 등장합니다. 이는 바로 유아기 때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과정을 겪으며 느꼈던 부친살해욕망(죽음충동)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면 설명하기 어렵죠. 죄의식은 간질과 같은 신경증적 발작을 일으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 저는 죽음충동을 인간의 근원적인 본능이라고 보는 생각에 반대입니다. 이 어두운 자살충동조차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주체에 대한 강한 압박 때문에 발생한 역사적인 산물인 것이죠. 이 세상을 잘 돌아보세요, 얼마나 살기 힘든지. 유아 때부터 우리는 자본주의적 인간(노동자)이 되기 위해 얼마나 끔찍하고 힘겨운 훈련과 학습을 받아 왔습니까? 마약과 술, 도박에 빠지는 인간은 이런 상황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이지요. 더 심해지면 자살로 가는 겁니다. 이런 욕망조차 사실은 사회의 억압적 구도에서 벗어나기 위한 능동적인 흐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런 현상에서 주시해야 할 것은 비정상이라는 낙인이 아니라 사회의 심각한 억압적 징후인 것입니다.

사회자: 그렇다면 이제 인간의 성과 욕망을 이성간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프로이트 선생님께서는 어떤 성적 결합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프: 물론 이성간의 성기를 중심으로 하는 성적 결합이 가장 이상적입니다. 그 외 여러 형태는 기본적으로 도착적인 성욕이라고 할 수 있으며 주로 유아기 때 퇴행하는 것입니다. 모두 리비도라는 성적인 에너지의 발달과정이 왜곡되었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들입니다.

가: 그렇다면 이성애적 결합의 이면을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나는 드디어 그녀를 가졌어!”와 같은 말을 내뱉는 남성들이 많죠? 이것은 바로 권력의 기호입니다. 남성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권력적이며 억압적입니다. 남성들은 대체로 페니스 중심의 사랑을 나눕니다. 심지어 페니스가 아니라 사정 자체에만 만족하는 남성도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 넓은 신체에서 페니스라는 작은 공간적 부분에서만, 심지어 사정이라는 순간적 시간에만 집중한다니 말입니다. 이처럼 신체에서 철저히 소외된 인간이 바로 남성입니다. 그러면서도  남성이 성관계에서 주도권을 쥐고 억압적인 방식을 재생산하고 있으니 참으로 비극입니다.  반면에 여성은 신체의 여러 표면을 통해 훨씬 커다란 즐거움과 쾌락을 보전해 왔습니다.

프: 그렇지만 페니스 중심의 성적 결합은 인간이 도착적인 성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선택하는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입을 중심으로 쾌락을 느끼는 단계에서 항문 중심으로, 다음에는 성기에 집중하는 식으로 인간의 리비도는 발달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성기 중심의 결합을 비난하는 것은 인류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이며, 이는 유아성욕으로의 퇴행에 불과합니다.

가: 그러나 그런 논리야말로 남성과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억압적 권력관계를 보지 못하고 무시하는 보수적인 사고방식에 불과합니다. 신체의 표면 전체를 쾌락의 지점으로 만들 수 있는 여성의 능력이 남성 지배적인 성관계로 들어서면 그 여성마저 성기 중심의 소외된 사랑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포르노산업이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구조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회자: 그렇다면 이런 성적인 관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 결론이 참으로 궁금하군요.

가: 남성의 여성-되기가 필요합니다.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남성이 페니스 중심의 소외된 관계에서 벗어나 여성처럼 신체 전체로 감응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죠.

프: 남성의 여성-되기라? 그렇다면 남성이 여성처럼 신체를 바꾸거나 동성애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건 다시 도착적인 성관계를 주장하는 것에 불과한 것 같군요.

가: 남성의 여성-되기는 여성적 신체로 전환하는 수술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 여성이 갖는 신체의 감응 능력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동성애자가 되는 것도 필요합니다. 단 오이디푸스적 구조에 갇힌 동성애자, 다시 말해 남성중심적 구도에 갇힌 동성애자는 이성애적 관계처럼 극히 억압적이고 보수적인 커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꼭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해방’이 아닙니다. 성해방이 우리로 하여금 남성과 여성의 구도를 그대로 간직한 채 성행위의 자유만을 주장한다면 그것은 억압적인 이성애적 구도의 유지에 불과합니다. 남성도 여성적이어야 하고 남성적인 것에 사로잡힌 여성도 여성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더 이상 남성/여성의 이분법적 구도는 불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체적 능력은 성별적 차이에 고착되지 않고 마음껏 욕망의 흐름에 개방될 것이고, 욕망의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흐름을 저지하는 억압적 구조와 투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의 해방이 아니라 욕망의 해방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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