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순수이성 비판>

권광수 / 철학과 석사과정
 

칸트 철학은 그가 정식교수가 된 1770년을 고비로 비판전기와 비판기로 흔히 구분된다. 그 이유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라이프니츠에서 볼프로 이어진 전통에서 벗어나 칸트 고유의 비판 프로그램을 기획하기 시작했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1781년에 출판된 <순수이성비판> ‘초판’은 그러한 비판프로그램의 첫 번째 성과이다.

당시는 한편으로는 이른바 라이프니츠-볼프 학파로 불리는 대륙 합리론의 유산과, 로크와 버클리, 그리고 흄으로 이어지는 영국 경험론의 주장이 서로 대립하던 시대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뉴턴역학이 세상에 나온 지 100여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각 학문이 현재와 같은 경계로 구획되기 전이었던 당시로서는 뉴턴역학에 대한 연구 역시 철학자들의 몫이었다. 이에 칸트로서도 뉴턴역학의 학문적 지위는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에 못지않은 문제였다.
칸트가 보기에 뉴턴역학은 자연에 관한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법칙이었다. 그러나 경험적 지식과 비교하여 추론적 지식의 확실성을 더욱 중시해온 합리론 전통에 의지해서는 자연에 관한 보편적 지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칸트 스스로가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고백한 흄과 같은 극단적인 경험론자는 지식획득의 가장 믿을만한 통로인 경험에 의지한다 하더라도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지식이란 아예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칸트가 뉴턴역학을 보편법칙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합리론이나 경험론의 토대가 아닌 지식에 대한 ‘제 3의 토대’가 필요했던 것이다.

칸트는 그러한 새로운 토대를 구축하기 위해 경험론과 합리론의 핵심적 사고를 동시에 받아들인다. 그것은 경험에 의해 얻은 지식은 불확실하며 보편성과 필연성 따위의 확실한 지식의 근거는 우리의 이성만이 보증할 수 있다고 하는 합리론자들의 믿음과, 우리의 지식은 경험에 의해 얻은 정보를 이성이 습관이나 연상등의 자연적 소질에 따라 가공한 것일 뿐이며 따라서 우리가 얻은 모든 지식은 다만 개연적 지식에 불과하다고 하는 극단적인 경험론에 대한 이론적 절충이었다. 만약 이러한 새로운 절충점을 성공적으로 마련할 수 있다면, 합리론과 경험론의 대립을 화해시키는 것과 동시에 뉴턴역학과 같은 새로운 경험과학을 보편과학으로 근거지울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그러한 절충의 목표가 ‘경험에 의해 얻은 지식이 어떻게 보편성과 필연성을 가지는갗 하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도에 대한 칸트의 출발점은 수학과 자연과학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지식이 가진 일반적인 특징에 관한 믿음이었다. 그러한 지식은 경험을 통해 확정된 것에 비해 좀 더 신빙성이 있고, 자신의 부정이 곧 자기모순은 아닌 특징을 가지고 있다. 칸트의 용어에 따르면 그러한 지식은 ‘a priori한 종합판단’이다.<순수이성비판>의 목표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그러한 특징을 가진 지식의 가능성에 대한 연구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능성에 대한 탐색이 경험으로부터 출발하긴 하지만 경험론자들의 방법과는 다르다는 의미에서 칸트는 ‘선험적’(transzendental)이라고 이름붙였다.

<순수이성비판>은 크게 보면 중요한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분석론’이고 다른 하나는‘변증론’이다. 전자에서는 a priori한 종합판단이 가능하기 위해 우리 인간이 가진 선인식적 능력들을 제시한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감성적 조건과 함께, 범주라고 하는 우리 이성의 12가지 추론적 조건들이다.‘분석론’은 한마디로 그러한 조건들에 대한 정당화 과정이다. 후자에서는 그러한 조건들의 범위를 넘어서는 주제에 지식이 어떤 모순을 초래하게 되는지를 보여준다.‘변증론’은 신, 자유, 영혼 그리고 우주 등에 대한 과학적 지식은 불가능하고, 만약 그러한 지식을 주장하게 되면 이성의 논과나 이율배반에 빠지게 된다는 경고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이 아무리 흥미롭다 하더라도 <순수이성비판>을 무작정 처음부터 읽어나가겠다고 생각한 독자가 있다면 곧바로 악명높은 칸트의 전문용어들의 숲에 빠져 길을 잃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전략이 흔히 이용된다. (1) 본격적인 읽기에 앞서 이를테면 a priori나 transzendental 등의 핵심용어를 정리해 본다거나, (2) 마음에 드는 해설서를 골라 읽어나가며 <순수이성비판>을 오히려 참조하는 방법이 있다. 만약 좀 더 전문적인 관심이 있다면 (3)<학으로 나타날 수 있는 미래 형이상학에 관한 서론>(보통 <프롤레고메나>라고 부른다)을 미리 보는 것도 유용하다. <프롤레고메나>는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칸트 자신의 해설서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밖에 어떤 방식의 접근이라도 좋다. 걸맞은 대가를 치르고 <순수이성비판>의 목표와 방법, 그리고 의의를 스스로의 힘으로 읽어낼 수 있게 되면 그 열매는 작지 않다. <실천이성비판>과 <판단력비판>으로 이어지는 칸트의 비판 프로그램 구조를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출발점이 되는 것은 물론, 나아가 수수께끼 같은 철학용어들이 더 이상은 낯설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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