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과 도시

 박삼철 / 미술인회의 공공미술위원장

도시를 삭막하고 황폐하다고들 말한다. 그것은 문제의 표면일 뿐이다. 문제의 깊이에는 우리 삶의 터전인 도시가 죽어가고 있다는 진단이 있다. 도시는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형식과 내용을 결정짓는 기본적인 ‘구조’이다. 그래서 도시의 조건에 대해서는 관대할 수가 없다.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실제로 ‘힘들어 죽을’ 지경을 감내해야 한다. 죽도록 일하고 공부하고 망가지도록 놀아야 한다. 노동이나 지혜, 향연이라는 본 의미는 일찍이 사라졌다. 도시를 ‘인류의 가래침’으로 본 18세기 루소를 거쳐, 지난 세기 건축학자 랭은 삶이 아니라 죽음을 만드는 ‘치명적인 도시’를 경고했다.

서술 공간으로서의 도시
왜 도시와 그 속의 삶은 죽는가. 도시, 특히 우리 도시는 디자인되는 인조물이다. 이 디자인을 주도하는 것은 도시학자 몰로치가 지적한, 권력과 돈의 연합체인 ‘성장기계’이다. 국민의 권력을 위탁받은 관료체제는 절차적 합리성에 따라, 자본은 효율적 합리성에 따라, 그리고 이를 실행하는 설계가와 건축가 등 디자이너는 기술적 합리성에 따라 도시를 만들고 정당화한다. 실제 도시는 성장하고 있고 성장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해내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도시인이 죽고 마침내 도시도 죽고 마는 비합리적인 결과가 도시의 문제이다. 최초의 도시 예리코를 비롯해 잉카와 마야의 고대 도시들이 폐허, 죽음으로만 존재한다. 
철학자 르페브르는 생산, 성장이 아니라 ‘살이, 살림의 재활’을 도시에 대한 인간의 권리로 선언했다. 그의 도시권은 도시에서 머물고 살 수 있는 권리이며, 이는 도시를 느끼고 서술하면서 비평하고 저항하는 ‘서술공간’을 모태로 한다. 성찰하는 철학과 서술하는 예술이 절차적, 효율적, 기술적 합리성을 성찰하고 보완할 때 그 공간은 가능해진다.

서술공간에 관한 한 도시설계, 건축, 디자인, 미술 모두는 그 동안의 기술적 효율성에서 벗어나 삶을 담고 키우는 살이, 살림의 디자인으로 변신할 것을 요구받는다. 그러한 예술적 변신의 한 양태인 공공미술은 미술관 밖에 있는 예술이 아니라 삶이 머물고 사는 공간과 그 속의 행위를 디자인한다. 단순히 도시환경을 미화·장식하는 조형물에 머물지 않고 도시와 공간의 의미를, 죽음에서 삶으로 변화시키는 다양한 행위들을 포괄한다. 그래서 그것은 죽어가는 도시에서의 ‘사건’으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공간, 사람과 환경 사이를 매개한다.

도시의 삶을 위한 공공예술
물론 공공미술이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출발은 헤게모니를 전시하고 훈육하는 모뉴멘트였다. 성장기계의 진선미를 담는 미학적 합리성으로 채택되었다. 서양에서는 말 탄 영웅들, 우리나라에서는 이순신장군 동상이 그 부류다. 일방적인 헤게모니의 문제를 인식하고 미술은 지배를 미학화·미시화하면서 공공 건축물과 광장, 공원 등과 같은 공공장소를 활용했다. 미술장식의 단계다. 뚜렷한 미학적인 위계를 바탕으로 도시의 문제를 오히려 분식한다는 비판에 따라, 그 다음은 공공장소의 정주성, 시각적 쾌적성, 사용 편의성을 강화하는 공간예술로 변신한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사회적이고 공익적인 요구에 대한 미술의 역할을 고민해 ‘공공미술’의 본격적인 토대를 만들었다.

이제 공공미술은 성형수술에만 치우치지 않는다.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과 상상, 비평을 삶의 터전으로서의 공간과 건물, 삶의 동반으로서의 공동체, 생태와 재결합시킨다. 미술과 삶, 삶터의 통합이라는 목표 아래 도시, 공간과 몸의 죽음을 비평하고 그들의 재생을 상상한다. 역사적인 흐름으로 보면 공공미술은 ‘미학-내-세계’의 독존에서 ‘세상-내-세계’의 공존으로 교정하는 민주화와 더 나아가 삶과 세상의 미학화를 함께 꾀하는 탈근대 예술의 몸부림을 반영한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미술관 안의 유폐를 거부하고 삶 속에 거처하면서 삶의 가치와 방식, 내용을 창발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기반이 된다. 성장기계는 생산과 지배의 진선미를, 절차적 민주주의는 형식적 주체를, 효율적 합리주의는 수량적 성장제일주의를 표방한다. 추하고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적 기반으로서의 아름다움은 그런 추함과 치명성에 저항하고 비평하면서 더불어 아름답고 함께 자유로운 꿈을 꾼다. 공공미술이 사회적인 건강성, 민주적인 자유, 생태적인 각성, 문화적인 다양성 등을 주요 의제로 삼는 것도, 온 사회가 생산과 소비로만 치달리는 것에 대해 사회문화적으로 대응하려 함을 보여준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공공미술제도는 아직 미술장식이라는 좁디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있다. 도시나 공간 만들기는 커녕 건축물을 분장하는 초보적 개념에 머물러있다. 도시사회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과 상상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알선, 리베이트 등 경제적 동기의 부패 속에 죽어 산다. 다행히 최근 정부와 국회 일각에서 건축물 미술장식을 공공미술로 전환하는 법 도입 작업을 진행 중이다. 도시의 진선미는 생산과 성장이 아니라 삶과 살림을 겨냥해야 한다. 그래야 미술도 살고 도시도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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