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과 자아정체성

글싣는 순서
1. 정체성의 정체
2. 다문화주의와 문화정체성
3. 심리학과 자아정체성
4. 정체성 정치 비판

 

  김효창 / 심리학과 강사

심리학적 정체성은 상호간의 소통으로 구성된다
심리학적 정체성은 상호간의 소통으로 구성된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정체성의 논의는 에릭슨의 심리 사회적 성격 발달 이론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에릭슨은 개인의 정체성을 객관적인 측면과 주관적인 측면으로 구분하였는데, 객관적인 측면은 심리 사회적 정체성(psychosocial identity)을, 그리고 주관적인 측면은 개별적 정체성(individual identity)을 의미한다. 여기서 심리사회적 정체성이란 개인이 속한 집단에 대한 귀속감 또는 일체감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는 한국 사람이다”와 같은 민족적·국가적 주체의식이나 “나는 00대학의 학생이다”와 같은 집단에 대한 소속감이 이에 해당된다. 반면, 개별적 정체성이란 집단적인 정체성 속에서도 자신이 집단속의 타인과 다른 고유한 존재라는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을 말한다.

개별적 정체성은 다시 개인적 정체성(personal identity)과 자아 정체성(ego identity)으로 나뉘어진다. 개인적 정체성이란 시간이 흐르거나 상황이 바뀌어도 자기 자신이 동일한 존재라는 자기 동질성(self-sameness)과 자기 연속성(self-continuity)에 대한 자각을 뜻한다. 즉 상황이 바뀌고 시간이 지나도 항상 “나는 홍길동이다”라는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이 바로 개인적 정체성이다. 이에 비해 자아 정체성은 보다 넓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개인적 정체성인 자기 동질성과 연속성을 유지하면서도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새롭게 부딪히는 다양한 내적 충동이나 욕구들, 외적인 자극들 그리고 도덕적 가치들을 수용하여 자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을 재통합한다. 이러한 통합 과정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타인과 구별되는 고유한 존재라는 전체감(wholeness) 내지는 통합감(integrity)을 갖게 된다. 즉, 우리가 사회적 상호작용 속에서 다양한 충동과 욕구, 능력, 역할, 가치 등을 통합하여 추출해 낸 통합된 자기구조(self-structure) 내지는 자기 참조적 심상들(self-referent images)을 자아 정체성이라고 한다. 자아 정체성은 한 개인을 과거에서 현재와 미래로 연결해주는 연속성 내지는 동질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타인과 구별해주는 독특성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강한 자아 정체성을 소유한 사람은 타인과 다른 여러 가지 개인적 특성을 소유하면서도 그런 특성을 조화롭게 통합해 나가려는 의지와 능력을 갖게 되며, 시간의 흐름과 경험의 변화 속에서도 자기 지각의 일관성을 지니게 된다.

정체성은 사회와 문화의 산물

생의 발달 과정에서 안정적인 정체성의 획득은 적응적인 삶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에릭슨에 의하면 청소년기는 정체성 획득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시기이다.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나는 누구인갗 혹은 ‘나는 변화하는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는갗와 같은 물음에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신의 능력이 무엇이며, 남은 인생을 위해 가장 적절한 역할이 무엇인지, 즉 정체성을 획득하게 된다. 반면, 안정적인 정체성을 획득하지 못하게 되면 남은 인생 동안에 수행하기를 원하는 역할을 확인하려는 압력을 심하게 느끼는 역할 혼란에 빠지게 되며, 이는 결국 성인이 된 후에도 적응에 지장을 초래하게 된다.

개인에 초점을 맞추어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독립적인 관계로 보는 서유럽과 북미 지역의 문화권에서는 한 개인이 독립적이고, 안정된 자기상(self-image)을 확립하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며, 자신의 능력·욕구·특성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역경을 의연하게 헤쳐 나가는 삶을 권장한다. 서구의 부모들은 자녀의 양육과정에서 자녀에게 독립성, 자율성을 강조한다. 반면, 상호의존적인 유교 문화권에서의 삶의 궁극적 목표는 주변 사람들과의 원만한 관계 속에서 부과된 역할을 충실히 하며, 이를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사적인 욕망을 통제하는 삶의 구현에 있다. 상호의존적인 문화권의 사람들은 상황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이에 부응하며, 남들에게 평가받는 자신의 모습에 관심을 쏟으며, 자신보다 타인을 배려하고, 자신을 희생하는 행동을 요구받는다. 유교 문화권의 부모들은 자녀교육방식에서 서구의 개인 중심적, 자기 개성적, 자기 독립적 개인보다는 개인-사회 조화적, 사회공동선적, 상호 협동적 인간을 더욱 중요시하고 이상화한다.

트리안디스는 문화적 차이에 기초해 문화를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로 나누고, 동양문화를 집단주의 문화로, 서구문화를 개인주의 문화로 보았다. 집단주의 문화권에서는 자신이 속한 가까운 내집단과 연결시켜서 자신을 파악하는 경향과 자신의 사회적 신분·역할 등이 개인의 정체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반면, 개인주의 문화권에서는 자신의 독특성(성격, 취향)이 정체성의 형성에 기여한다. 즉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정체성의 형성에 객관적인 측면인 심리 사회적 정체성이 더 많은 영향을 미치는 반면,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주관적인 측면인 개별적 정체성이 집단정체성보다 주목을 받는다.

집단주의적 성격의 한국인

한국인들에게 ‘너는 누구냐(Who are you)’라고 물으면 무척 당황해한다. 왜냐하면, ‘너는 누구냐’라는 물음은 심리사회적 정체성보다는 개별적 정체성을 묻는 물음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집단주의 문화권에 속한 한국 사회에서는 정체성의 형성에 심리 사회적 정체성이 더 많은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한국인은 자신의 독특성에 기초하여 정체성을 확립하기보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속성에 기초해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한국인에게 있어 존재론적 의미를 내포하는 개별적 정체성은 현실의 삶 속에서 그리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지 않는다. 반면 개인주의 문화에 속하는 서구 문화에서는 심리 사회적 정체성보다는 개별적 정체성이 개인의 정체성 형성에 깊이 관여한다. 따라서 서구 문화권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존재론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개별적 정체성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며 삶의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개별적 정체성에 관심을 갖는다.
일상적인 언어생활 속에서도 한국인들은 개별적 정체성에 가까운 ‘나’ 즉 ‘I’나, ‘나의’ 즉 ‘my’를 쓰는 것이 적합한 상황에서 ‘우리’ 즉 ‘we’나, ‘우리의’ 즉 ‘our’를 사용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나의 학교’를 ‘우리 학교’로 칭하는가 하면 심지어 ‘my wife’를 ‘our wife’로 말하기도 한다.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심리사회적 정체성은 개별적 정체성에 비해 가변성이 낮다. 따라서 심리사회적 정체성에는 많은 관심을 쏟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개별적 정체성은 가변성이 커 매 순간 변화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정체성을 형성함에 있어 심리사회적 정체성의 영향을 많이 받는 문화권의 사람들은 개별적 정체성의 영향을 많이 받는 문화권의 사람들보다 정체성의 문제에 덜 관심을 갖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정체성의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개별적 정체성보다는 심리사회적 정체성이 정체성의 형성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문화적 특성뿐만 아니라 시대적 특성을 반영한다. 사회의 구성원인 한 개인은 자신이 속한 사회적 가치를 새롭게 수용하고 재통합하는 과정을 통해 정체성을 형성, 변화시키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시대적 특성이 정체성에 투영된다. 따라서 시대적 특성이 변화하게 되면 개인의 정체성에 담긴 내용 또한 변화를 겪게 된다. 그러나 정체성의 내용이 변화할지언정 구성 요소인 심리사회적 정체성과 개별적 정체성은 변화하지 않으며 단지 정체성의 형성에 대한 서로간의 영향력만이 변화하게 된다. 근자에 들어 우리 사회가 점차 정보화 사회로의 변화가 수반되면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개별적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정체성의 형성에 개별적 정체성의 영향력이 점차 증가하게 됨을 의미한다. 결국 세대 간에는 개별적 정체성에 담긴 내용과 정체성에 대한 개별적 정체성의 영향력이 차이를 갖게 된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정체성은 문화와 시대적 특성을 반영한다. 따라서 정체성에 대한 논의는 개인과 문화 그리고 시대적 특성을 함께 아우르는 종합적 틀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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