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에 의해 이용당한참여민주주의

이헌석/청년환경센터 대표

경주가방폐장유치지역으로선정됨에따라지난19년간첨예한논쟁과대립을거듭했던방폐장문제가마침내고난의마침표를찍었다.그러나이번유치과정에서지나친경쟁과관권시비등여러문제점들이드러났다.이번사회기획에서는갈등사안을처리하는데주요했던주민투표에대한문제점을지적하고자한다.<편집자주>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여러 가지 제도 가운데, 주민투표제도는 지역주민들이 해당 현안을 직접 결정한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높은 제도이다. 그동안 공청회, 설명회 등 정책 입안과정에서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장치는 있었으나, 대부분 일방적인 정책 추진을 보완하거나 심한 경우 지역주민들을 들러리로 만드는 ‘면죄부’ 역할을 해 왔기에 주민투표 제도 도입은 시민사회단체의 주요 요구사항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주민투표제도가 법제화되는 과정에서 정부의 의견이 일방적으로 반영되어, 주민들이 주민투표를 청구할 수 있는 문턱이 너무 높고(유권자의 1/5~1/20의 서명이 필요), 이에 비해 정부와 지자체는 언제라도 주민투표를 할 수 있는 등 지역주민들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이 있었다. 다시 말해 형식은 민주적 절차를 따르는 주민투표이지만, 실제 내용은 정부나 지자체의 이해에 따라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11.2 방폐장 주민투표’를 둘러싼 백태
이러한 우려는 지난 11월 2일 벌어진 ‘11.2 방폐장 주민투표’에서 현실로 드러났다. 산업자원부가 해당 지자체에 요청해서 진행된 ‘11.2 방폐장 주민투표’에는 처음부터 ‘지역주민’은 없었다. 투표운동에 들어가기 전부터 해당지역에서는 빵과 음식이 공개적으로 나눠졌고, 관광버스를 동원해 ‘견학’이라는 이름의 향응이 제공되었다. 또한 공무원들은 스스로 조직을 만들어 핵폐기장 유치운동에 누구보다 앞장 섰다. 모두 일반적인 선거라면 법률에 위배되어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다.
무엇보다 ‘11.2 방폐장 주민투표’ 타락의 백미는 40%에 이르는 부재자신고와 이를 둘러싼 부정투표였다. 주민투표가 진행되었던 군산, 경주, 영덕, 포항 등 4개 지역은 공무원들을 동원한 경쟁을 통해 사상 유례 없는 40%의 부재자신고율을 기록했다. 이 과정에서 부재자신고서를 대신 작성해 준 ‘대필 신고서’가 무더기로 발견되는가하면, 사회복지수급자들을 대상으로 부재자신고를 강요하는 등 부재자 신고 '실적채우기‘가 매우 광범위하게 벌어졌다. 이러한 행위는 선거관리위원회가 전체 25만명의 부재자신고서 중 0.6%인 1500여명을 대상으로 찾아낸 것만 800여장이나 되었고, 4개 지역대책위 중 한 곳인 영덕 대책위가 지역조사를 통해 밝혀 낸 것만 41.4%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이었다. 또한 부재자투표 신고자들에 대한 선거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이장이 대신 투표용지에 기표를 하거나, 지역주민이 기표한 투표용지에 다시 기표를 하여 무효표를 만드는 것 같은 기막힌 일들까지 벌어졌으니, 이를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한편 지역간 경쟁이 심했던 주민투표운동기간에는 망국적인 지역감정이 다시 나타나 주민투표의 의미를 더욱 흐리게 만들었다. “경상도 문딩이들에게 이제는 질 수 없다”는 현수막이 군산에 나붙는가하면, 똑같은 현수막을 만들어 “이것은 ‘군산’에 걸린 현수막입니다”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붙여 경주에서 활용하는 등 핵폐기장 유치를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쟁”으로 몰고 갔다. 그 밖에 주민투표운동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공무원들이 유치 활동을 위해 삭발을 하고, 유인물 배포에 나서는 등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 때나 봄직한 일들이 21세기인 지금, 4개 지역에서 벌어진 것이다.

이번 주민투표는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비극의 단편
이러한 일들의 핵심에는 핵폐기장 건설을 무리하게 강행하려는 정부의 판단 착오가 있다.
정부는 부안사태가 종결된 직후 핵폐기장 문제를 순조롭게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으나, 문제를 단지 지역주민들을 지원하기 위한 체계의 문제나 진행 형식의 문제로 생각했다. 따라서 미비한 지역지원을 법률로 보장하고, 지자체간의 경쟁을 통해 해결하려는 방법을 오해 추진한 것이다. 언제나 참여민주주의를 강조해 온 참여정부였기에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주민투표를 통한 핵폐기장 건설 결정은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90%에 이르는 찬성 결과를 보고 매우 흡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수치만을 놓고 만족해한다면, 우리 사회는 타락의 길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핵폐기장의 특성상 안전성과 지역적합성이 최우선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원론적인 지적이나 핵폐기장 문제의 본질인 핵발전 위주의 에너지 정책을 뜯어고쳐야 한다는 포괄적인 이야기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이번 ‘11.2 방폐장 주민투표’는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큰 오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높은 찬성률로 핵폐기장 문제를 해결했다고 자화자찬한다면, ‘결과만 중시하고 과정은 경시’하는 우리사회의 고질적인 문제를 다시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를 40년이나 후퇴시키고, 안전성에 대한 검토도 없이 성공했다고 ‘카 퍼레이드’나 벌이고 서로의 공적을 치켜세우기에 여념이 없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주민투표 승/패를 떠나 한편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저작권자 © 대학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