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취재>프랑크푸르트 도서전

   박성용 / 프랑크푸르트 대학 독문학 과정

  지난 19일부터 23일까지 프랑크푸르트 도서 전시회가 열렸다. 계몽의 과정을 급속도로 진척시켰던 출판 기술의 부산물이자 충실한 기록이었던 도서 전시회는 세계화의 진척 과정에서 문화와 문화를 잇는 중요한 계기기 되었다. 그리고 도서 전시회의 마지막 날에는 비판적 문인들을 지원하기 위한 독일 서적상 연합이 수여하는 평화상 시상식이 열렸다. 정치적인 함의도 지니고 있다. 물론 규모로 따져 보면 몇 주 전에 같은 공간에서 열린 자동차 전시회에 비해 보잘 것 없겠으나 정신의 자유를 추구한다는 이념만큼은 시장의 논리에 덜 노출되어 있었다.

세계화의 불균형


  ‘세계화 과정’이라는 말이 일상화되기 전부터 독일은 음악과 사상 그리고 기술의 나라로 한국인들의 인상에 깊이 새겨져 있다. 많은 젊은이들이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으며, 독일의 지식들은 여전히 관심사이다. 그리고 한국의 기업들은 독일 지역에 유럽 본부를 세우고 있어 경제 분야에서도 독일의 입지는 중요하다. 반면 한국 문학과 사상에 대한 독일인들의 관심은 상대적으로 적다고 단언할 수 있겠다. 세계화 과정은 분야에 따라서 이토록 불균형 상태에 치우쳐 있었다.
  씁쓸한 장면이지만 베트남 식 옷을 입은 사내가 운전하는 시클로를 타고 가면서 ZDF의 리포터는 그 사내가 한국인으로 분장했다면서 이번 도서 전시회의 주빈국을 잠깐 소개하기도 했다. 실제로 프랑크푸르트 도서 전시회에 대한 독일어판 인터넷 사전을 읽다 보면 “독일 철학 아니면 심지어 독일 아동·청소년 서적이 한국에서 매우 찾아보기 쉬우나, 독일어권에서 한국 작가들은 알려지지 않은 상태”라는 서술을 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 너무나도 자명한 필자에게, 의아하게 받아들여졌던 것은 프랑크푸르트 도서 전시회의 주빈국이 되면 그 몇 해  후에 그 나라에서 노벨 문학상을 탄다는 속설이었다. 이에 따라 국내 신문을 검색해 본 결과 90년 일본이 도서 전시회의 주빈국이 된 지 4년 후에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 문학상을 탔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당시에 인터넷 사전이 있었다면 지금 한국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일본의 작가들이 독일어권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쓰여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예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번역될 때마다 TV와 방송 매체에서 연일 비평의 대상이 되곤 한다. 심지어 대략 4~5년 전 TV 방송에서 무라카미의 소설에 대해 ‘패스트푸드’와도 같다고 말한 비평가는 문학 비평계의 ‘교황’ 라이히-라니츠키에게서 얼굴이 벌개지도록 공격을 받다가 결국 고정적으로 출연하던 그 방송에서 출연을 중단한 사건도 있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모 일간지가 하루키를 찾아가 지구 반대쪽인 독일에서 자기를 둘러싸고 이런 사건이 벌어졌다는 사건에 대한 반응을 묻는 아이러니한 일도 있었다.

 

세계시민으로서의 기회


  이런 사건이 지니는 의미는 대중적으로 읽히고 토론되는 작품이 관심을 끈다는 예를 들어 라이히-라니츠키나 엘케 하이덴라이히가 한국 소설이나 시집 한권을 들고 나와서 소개를 했더라면 효과적인 광고가 될 것이다. 도서관에 대한 보르헤스의 상상력을 빌리지 않아도 점점 거대해지는 도서관 속에서 읽히는 책을 찾아낸다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책이 기하급수적으로 쏟아지는 시대에 그저 기념비로 남지 않고 대학의 세미나 시간에서뿐 아니라 일반 방송에서도 읽히고 토론되는 책이 늘어나기를 기대해 볼 수 있다. 그렇기에 독서 체험의 차원에 대해 최인훈이 일본어로 번역된 독일어 책을 읽으면서 한국어로 생각하던 과정을 회상하는 장면을 떠올리면서 이야기해 볼 수 있다.
  이는 이성의 왕국 속에서 건전한 사유의 능력을 가진 이라면 그 왕국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신뢰감의 표현이다. 이를 뒤집어 독일어나 기타 언어로 번역된 한국어 책을 읽으면서 세계 시민이 되었다는 체험에 도달할 수 있는지가 필자에게는 도서 박람회의 주빈국이 되었다는 기회를 빌어 노벨문학상도 기대해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낙관을 품는 것보다 훨씬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싶다.
  문학과 사상은 곧 이성의 평등한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상상의 공간으로 이 속에서 세계시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치고받고 싸운다. 파울스키르헤에서 수여되는 평화상의 의미도 이러한 의미에서 짐작해 볼 수 있겠다. 파울스키르헤는 1848년 혁명 이후 독일에서 처음으로 의회가 구성되어 모인 곳이자, 45년 9월에 프랑크푸르트 도서 박람회가 근 200년 이후 다시 개최된 장소이기도 하며, 뷔히너 상과 같은 권위 있는 문학상이 수여되는 뜻 깊은 장소이다.
  최근 03년에 평화상을 받은 명사는 미국의 문화비평가인 수잔 손탁이었으며, 올해는 터키의 오르한 파묵이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런 세계적인  명예의 전당에 대한 관심도 기대해 볼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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