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도 / 성공회대학교 연구교수

  
  

최근, 그러니까 불과 며칠 전인 10월 17일 33차 유네스코 총회 문화분과위원회에서는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을 위한 협약”, 즉 이른바 “문화다양성 협약”이라는 것이 통과되었다. 뒤이어 20일 유네스코 총회 본회의에 상정되어 회원국의 압도적인 지지로 공식 채택되었다고 한다. 이 국제협약에 포함되어 있는 주요 내용 가운데 하나는 바로 “각 당사국들의 문화표현이 위협받거나 취약한 상황에 있을 경우, 자국 영토 안에서 문화적 표현의 다양성 보호와 증진을 목표로 규정을 만들거나 재정을 지원하는 방안을 채택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는 한국과 같이 스크린쿼터제 유지를 주장하는 국가들에게 유리한 조항으로 이번 협약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이 협약의 채택은 앞으로 시장 논리로 인해 문화 주권을 침해받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국제법적 근거를 마련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번 투표에는 154개 회원국이 참여하였는데, 그 가운데 미국과 이스라엘 두 나라(그밖에 기권한 네 나라)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찬성표를 던졌다고 한다. 이처럼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한 목소리로 문화의 다양성을 보호하고 증진할 것에 대해서 찬성하게 된 데에는 세계무역기구(WTO)체제의 등장 이후 문화상품과 관련하여 미국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새로운 흐름에 대한 우려가 크게 작용하였다. 이들이 우려하는 것은 시장 논리로 일부 문화 자본에 의한 독점과 문화적 획일화 현상이다. 냉전 체제의 해체와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자본은 더 이상 그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그리고 인간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시장 속으로 편입시키고 있다. 그리고 후기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문화는 가장 매력적인 상품으로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문화를 시장의 지배를 받는 하나의 상품으로서 취급하는 자본의 논리는 10여 년 전 영화 <쥬라기 공원>의 흥행 수입을 자동차 150만대의 수출액과 비교하며 산업으로서 문화의 가치와 위력을 강조하던 국내의 담론들 속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자본에 잠식된 문화 주권과 종다양성 수호


할리우드로 상징되는 미국의 거대 문화산업자본으로부터 자국의 문화산업을 보호하고 국부의 유출을 막고자 하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의 선진국들은 물론 제3세계 국가들까지 한 목소리로 ‘문화 다양성’의 보호를 주장하도록 만든 것이다. 결국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정점에 있는 미국 문화산업의 독점과 획일화에 대항하여 민족-국가(nation-state) 차원에서의 문화 주권과 문화적 정체성의 보호라 하겠다.
이들 민족-국가들은 한편으로는 그 경계를 허물고 획일화하려는 경계 바깥의 문화 헤게모니에 대항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각국의 문화적 다양성의 보호를 주장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 경계 내에서의 다양한 하위문화(subculture)나 소수자 문화가 외치는 문화적 복수성과 다양성의 주장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만은 않다. 오히려 대부분의 근대 민족-국가들은 그동안 단일한 문화 정체성의 형성을 위해 하위문화나 소수자 문화를 억압·배제하거나, 혹은 애써 외면하고 기억 저편에 묻어둔 채로 지내왔다고 하는 것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결국 민족-국가라는 경계를 사이에 두고 중심과 주변, 혹은 주류와 비주류의 동형구조가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사실 문화적 정체성이란 그리 명확하거나 확정적이지 못하며, 매우 유동적이고 모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 공동체 내에서 선천적인 유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학습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습득, 전달 받은 모든 것들을 문화라고 한다면, 문화적 정체성이란 어려서부터 접해온 동요와 음악으로부터 해서 음식, 의상, 영화, 예술, 그리고 관습, 종교 등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한 층위와 다양한 형식들을 통해서 형성되는 극히 복잡하면서도 다중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공동체의 범위, 구성 주체의 관계 등에 따라 매우 다양한 층차를 지니는 복수(複數)의 문화적 정체성이 가능하다.
하지만 근대 민족-국가에 있어서 문화적 정체성은 하나의 정형화된 문화의 모듈을 정하고 이를 각종 제도적 장치와 미디어들을 통해 교육 보급시키는 과정에서 형성되어 나온 인위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국민들은 문화라는 형식을 통해서 민족-국가라는 “상상의 공동체”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국민화” 되어 왔던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한편으로 많은 과거의 문화적 요소들은 박제화되고, 다양한 하위문화와 소수자 문화들이 억압·배제되거나 외면당해왔으며, 다른 한편으로 구성원들의 삶의 방식은 상당 부분 자본주의 문화, 서구 문화, 근대적 삶의 방식, 도시 생활 등으로 획일화, 혹은 동질화(‘근대화’, ‘서구화’, ‘선진화’, ‘발전’, ‘개발’이라는 이름 하에)되어 왔다.
결국 하나의 민족-국가에 있어서 하나의 동질적 문화 정체성은 대외적으로는 저항적으로 작용하면서 또한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억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비서구 국가들에게 있어서 이 같은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 편인데, 천 샤오메이(Xiaomei Chen)가 설명하는 현대 중국에서의 문화 현상들 속에 나타나는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 역시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민족-국가 내부의 주류 문화가 종종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대항하고 내적으로 문화적 정체성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소수자 문화나 하위문화를 분리주의로 몰아 억압·배제하기도 하고, 한편으로 사회 내 주류 문화 대해 저항하는 하위문화가 종종 외부의 주류 문화와 결탁하기도 한다.
민족-국가를 경계로 해서 나타나는 문화 헤게모니의 이중 구조로 인해 문화 정체성은 양가적 의미를 지니게 되며, 또한 그 속에서 우리는 종종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구호에 대해 안과 밖에서 두 가지의 포즈, 혹은 이중 잣대를 취하곤 하게 되는 것이다.

문화정체성의 이중잣대


최근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 특히 동북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급속한 변화들은 문화 정체성의 양가성과 모호성을 더욱 배가시키고 있다. 한편에서는 중국에서의 동북 공정과 같은 소수민족에 대한 동화 정책이나 일본에서의 ‘재국민화’(renationalization)와 결부된 우경화 현상들과 같이 내부적으로 하나의 단일한 동질적 문화 정체성을 강화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한류(韓流)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상호간의 정치, 경제, 문화 등의 각 방면에서의 전면적인 교류의 확산과 문화적 경계가 허물어지는 듯한 현상들도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은 다양한 문화적 형식들(문화상품 혹은 문화컨텐츠라 불리는)이 물리적 국경을 넘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중요한 매개를 제공해주고 있다.
위의 변화들 가운데 특히 짭짤한 외화 벌이와 국위 선양을 동시에 가져다주고 있는 한류 현상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포즈가 왠지 엉거주춤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시 말해서, “문화는 상품이 아니며 각 국가의 다양성과 창조성을 위해 상품 논리, 자본 논리만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외치면서 동시에 “더욱 상품 가치를 높이고 시장을 확대해야 한다”고 외치는, 그리고 우리 내부의 소수자 문화의 다양성은 외면하면서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문화의 다양성을 외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문화 다양성 협약을 계기로 다음과 같이 재질문해 보는 작업이 필요할 것이다. 주류 문화, 혹은 문화 정체성으로부터 배제되고 소외된 하위문화와 소수자 문화를 어떻게 복원시킬 것인가. 어떻게 이들 문화적 다양성을 통해서 새로운 문화 정체성을 형성해나갈 것인가. 문화적 다양성, 혹은 다문화주의는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이중 잣대를 가지고 “문화 다양성” 구호를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마지막으로 첨언하자면, 기존의 근대적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차이와 다양성이 서로 어우러지되 동질화되지 않는 “和而不同”적 방법론을 통해 새로운 문화 정체성을 모색해 나갈 필요가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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