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의 시립 예술단 해체 시도를 둘러싼 한국문화지형도

문강형준/무크지<모색>편집위원

   광화문 복판에 우람하게 서있는 세종문화회관 앞에는 40여일 전부터 초라한 천막도 함께 서있다. 한국 예술의 ‘고상함’을 상징하는 세종문화회관 앞의 이 수상한 천막에서는 서울시예술단 노조원들이 모여서 파업 중이다. 예술단 노조에 따르면, 이들은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서울시극단, 서울시무용단, 서울시뮤지컬단, 서울시합창단 등 서울시교향악단을 제외한 예술단체를 해체하려는 서울시의 계획을 저지하려고 거리에 나섰다. 물론 서울시와 세종문화회관 측에서는 “단지 몇 가지 논의를 했을 뿐 시행계획은 없다”며 해명을 했지만, 서울시와 세종문화회관이 함께 만들었다며 노조가 지난 달 공개한 ‘예술단체 운영체제 개선방안’이라는 문건에는 한 컨설팅 업체가 각 예술단체를 어떤 식으로 ‘개선’할 것인지를 고민하면서 ‘폐지’와 ‘해체’ 의견을 낸 것으로 드러났다.
  청계천의 화려한 새물맞이 행사에 가려 중앙 일간지들이 거의 외면하고 있는 이 작은 사건은, 하지만 한국의 지배 엘리트가 문화를 보는 시각들을 곳곳에서 드러내는 복합적 실례가 된다.

서울 예술단 ‘해체’의 의미
  첫째, 문화를 수익성으로만 판단하려는 습성이다. 아도르노가 비판적인 의미로 만들어 냈던 ‘문화산업’이라는 말이 한국에서는 2000년대 이후 수익을 창출하는 문화의 산업적 속성을 찬양하는 말로 완전히 바뀌었다. 영화가 예술적 성취가 아닌 자동차 수출과 비교되고, 한류가 동아시아권에서 창출되는 경제효과로 환산되며, 버스전용차로제가 공간문제가 아닌 교통체증해소에 따른 이익으로 변환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수익이 없는 문화단체는 없애도 된다는 발상은 경제에 도움이 안 되면 문화도 필요 없다는 식의 사고에서 나온 산물이다. 이는 삶의 모든 중요한 측면들이 ‘경제’로만 규정되는 요즘 한국사회의 병적 태도와 맞닿아 있다.
  둘째, 소수문화에 대한 배타적 시각이다. 버스나 잔디광장이나 청계천은 모두 서울시민 전체의 일상과 관련된 거대한 문화사업이지만, 이에 비해 국악관현악이나 무용, 연극, 합창 등은 그만큼의 파급력은 없는 ‘소수문화’다. 공간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버스차로 개선은 중요해도 소수 마니아를 위한 국악관현악은 덜 중요하고, 친환경적인 청계천 복구는 소중해도 관객이 적은 무용공연은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고, 다수의 쾌감을 위해서라면 소수의 변태는 없애도 된다는 식의 발상. 군대와 회사, 나아가 사적관계에서도 지배적인 이런 집단주의적 문화는 다수의 동의를 획득하지 못한 소수문화를 차별할 수밖에 없다. 동성애자나 장애인, 미혼모, 이혼녀, 동거커플, 펑크족을 거리에서나 사적으로 별로 볼 수 없는 우리 문화는 소수자를 질식시키면서 살아가는 배타적 문화다.
  셋째, 문화 노동자에 대한 폭력적 태도다. 앞에서 이야기한 컨설팅 문건은 ‘개선방안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노조의 동의가 선행되거나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어야 함’이라는 개선전제를 명시하면서, ‘서울시의 예술단 예산지원 중단 방침결정 등 조치가 선행되어야 함’을 제안하고 있다. 서울시예술단 소속의 노동자들과 1차적으로 진지하게 협상하려는 태도는 없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를 들어 어떻게든 노조를 무력화시키려는 것이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유명 배우들에게는 수십억의 돈을 쓰면서 스탭들의 월급은 떼어먹는 게 다반사인 영화판을 되새겨보라. 이 역시 문화를 하나의 경제행위와 가치창출수단으로만 보는 경제주의적 태도에서 나온 폭력이고, 이번 사건에서 재탕되고 있는 것이다.

문화와 신자유주의
  한국사회에서 문화산업을 경영하는 위치에 있는 엘리트들에게 뿌리 깊은 이 세 가지 습성은 10년 가까이 광풍처럼 몰아치고 있는 전지구적 신자유주의화의 물결 속에서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서울시예술단 해체를 제안한 ‘컨설팅’ 문건에는 ‘작품마다 단원을 공모하는 프로덕션제 도입’, ‘핵심단원만 상근하고 공연내용별로 오디션을 거쳐 충원’, ‘상업적으로 충분한 경쟁력을 갖춘 장르이므로 전속단체에서 제외’ 등등의 의견이 실려 있다. 프로덕션제, 태스크 포스, 비정규직, 상업, 경쟁력 등 재벌기업 마케팅 회의에서나 들릴 법한 말들이 시민을 위한 공익적 예술단의 해체에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사고체계는 이처럼 공연문화의 대표적 장르들을 부실경영재벌의 문어발 회사들로 전락시킨다. 아울러 신자유주의는 가진 자들의 ‘자유’는 우상숭배하면서 역설적으로 표현의 자유(김인규 교사 처벌ㆍ카우치 구속ㆍ시청 앞 잔디광장 집회불허), 노동자의 자유(서울시 예술단 해체기도ㆍ영화 스태프 처우), 문화적 소수자의 자유(청소년 연령대 상향조정) 등은 억압한다. 이번 사건은 바로 이런 신자유주의 세계화 조류 속에서의 문화적 보수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공익을 위해 설립된 문화 단체가 시민들이나 해당 노동자들의 의사가 반영되지도 않은 채 몇몇 공무원과 ‘전문갗의 손에 좌지우지되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명박 시장이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해 버리는 것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쳐도, 서울시예술단이 자본의 시장에 봉헌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 문화는 돈이 되지 않는다 해서 누가 함부로 개선하거나 해체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다시, 문화전쟁은 시작되었고, 그것은 우리 모두가 싸워야 할 전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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