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트런드 러셀<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기독교인에게는 다소 자극적인, 어떻게 보면 시비를 거는 듯한 제목의 이 책은, 제목에서도 말했듯이 러셀 자신이 왜 기독교 교리를 믿지 않는지, 정확하게는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이 어떤 문제를 갖는지 치밀한 논리를 통해 반박한 글이다. 먼저 말해두지만, 러셀의 기독교 비판의 대상은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의 성스러움이 아니라 기독교 교리와 그 배타적인 신앙이 야기하는 사회적인 위협이다. 즉 그는 하나의 독단적 종교 형태로써의 기독교를 비판한 것이다. 따라서 종교가 갖는 풍부한 의미와 상상 외적인 가능성을 치밀한 논리를 통해 무시했다거나, 비기독교신자들의 감정을 대신 해소해줬다는 식의 반응은 러셀의 입장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전제하지 않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먼저 인간의 인식과 종교를 상정한다. 그의 논리대로 하자면, 인간은 영혼이나 환생, 천국이나 지옥과 같은 세계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그 인식에 도달했다고 말하며, 이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주저하지 않는다. 더욱이 그는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주관적 경험, 예를 들어 많은 이들의 종교적인 체험이 진리인지 단순한 주관적 환영인지 구분해 낼 방법에 대해 질문하지 않은 채 그것을 모두 진리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이 신의 현존을 증명하는 어떠한 근거도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진리에 대한 주관적 믿음 비판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그는 기독교라는 종교 그 자체의 신성함을 비판하려는게 아님을 재차 확인한다. 그것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문제는 증명할 수도 없으면서 그것을 진리로 설파하고, 신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다른 신에 대해서는 주저없는 공격을 가하는 기독교의 교리이다. 실존의 선험성을 전격적으로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 러셀의 이러한 자세야말로 기독교 교리에 대한 그의 비판에 있어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의 저작에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로 목적론이 있다. 신을 믿는 이들에게 인류는 신의 목적에 따라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윈 이후 생물이 환경에 맞춰 변해 온 적응의 기본원리가 확립되었으며, ‘거기에 목적의 증거 따위는 전혀 없다’고 못 박는다. 그리고 KKK단이나 파시스트 같은 온갖 결함들을 지닌 인간들이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최선의 것이라고 믿을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도덕적 열정에 사로잡혀 선과 악을 구분하는 종교적 판단에 대해서도 그는 회의적이다. 결론적으로 그는 선(善)은 추상적으로 사고할 때만 가능한 것이며 오히려 구체적으로 목격할 수 있는 것은 세계의 악이라고 단언한다. “문명 국가들은 국고 수입의 절반 이상을 상대국 시민들을 살육하는 데 쓰고 있다…(중략)… 산 사람을 제물로 삼고, 이단자를 박해하고, 마녀사냥을 감행하고, 유대인을 학살하더니, 마침내 독가스에 의한 대량 박멸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이 같은 혐오스러운 행위들과 그들을 자극하는 윤리론들이 과연 지적인 창조주의 증거가 될 수 있는지 회의한다. 오히려 그는 세상의 혼돈을 “우연이라고 보는 것이 좀 덜 고통스러우며 보다 그럴듯한 가정”이라고 생각한다.

유용성을 넘어 진실성의 종교 되어야
이러한 그의 주장들은 현재 국제정치와 국내 상황에서도 유효한 설명력을 가질 것이다. 타국의 정체성을 마음대로 ‘악’으로 규정함으로써 그 국가에 대한 침략행위를 기독교적 절대선으로 가장하는 행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기독교 국가들의 전략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전체 기독교도 아니고 일개 교회에 대한 비판을 하기 위해서 생명의 위협마저 감수해야 하는 한국의 미디어 환경도 자기믿음의 절대성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하겠다.
미국은 과거 기독교 세력들에 의해 헌법에 명시된 교회와 국가의 분리원칙 수정이 시도된 바 있으며, 최근의 이라크전이나 대북정책에 대해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상당수의 시도들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 신성을 인지했다는 ‘믿음’이 다시 그 믿음의 근거로 작동하는 기독교 교리는 이제 진실성의 문제를 뛰어넘어 유용성의 사안이 되었으며, 현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기독교의 움직임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러셀에게 오히려 악이란 반대 증거로 인해 의심이 생길 때 그 증거들을 억압해야 한다는 주장을 서슴치 않는 종교, 또는 종교에 가까운 교리들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못 듣도록 하는 러시아나, 공산주의를 못 듣도록 하는 미국은 악을 생산하는 공장과 같다. 따라서 사회는 자신들과 다른 광신주의를 가진 상대편에 대해 광적인 적대감으로 가득차게 되며, 특히 모든 종류의 광신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더한층 적의를 가지게 된다고 보았다.
그가 이 책을 통해 바라는 세상은 바로 이러한 집단적인 적대감으로부터 해방된 세계, 만인의 행복은 투쟁이 아니라 협력에서 나올 수 있음을 깨달을 수 있는 세계이다. 그는 증거에 입각해 확신하는 습관, 증거가 확실하게 보장하는 정도까지만 확신하는 습관이 일반화된다면 현재 세계가 앓고 있는 질환의 대부분이 치유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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